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자정을 넘긴 야심한 시각, 친구 J에게 카톡이 왔다.
"늦은 시간에 미안한데.. 010-5395-xxxx 이 번호로 전화 좀 걸어봐 줄 수 있어? 신호 가는지 확인해 보게"
나는 곧장 전화를 걸어보았고 한참 동안 통화연결음이 이어졌지만 끝끝내 받지 않았다.
"신호 잘 가는데? 이 번호 누구야?"
"요즘 만나는 남잔데 지금 지방 출장 가서 야간 근무한다는데 연락이 뜸해서 전화했더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자동 멘트로 넘어가서.."
"S기업이 무슨 주말에 출장을 보내 자동 멘트로 넘어가면 차단했나 보네"
"그치 차단한 거 같지?"
"응"
"내 전화만 차단하는 게 말이 되나?"
"딴 여자랑 같이 있으니까"
"하.. 어제 생일이라고 생일밥 먹여놨더니.. 바로 배신하네"
"그러게 나쁜 놈이네.. 차단까지 해둔 정도면 지금 같이 있는 여자가 메인 여친인가 본데?"
J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언제쯤 차단 풀고 다시 연락 올까?"
"음.. 아마 내일 정오에 호텔 체크아웃하고 여자랑 점심 먹고 커피 한 잔 하고 헤어지면 오후 2~3시쯤 연락 올 거 같은데?"
"그때 연락해서 대체 뭐라고 핑계 대려나?"
"출장 갔다고 밑밥 깔아놨으니 회식자리에서 사람들이 술 많이 먹여서 기절했다가 지금 일어났다고 하겠지.. 뻔히 보인다."
J는 그날 밤 심장이 타들어가는 분노와 상실감으로 긴긴밤을 하얗게 태웠다.
- 다음날 오후 3시 -
정확히 내가 예상했던 시간에 남자는 J에게 전화를 걸었고
내가 예상했던 멘트 그대로
회식 자리에서 사람들이 술을 너무 많이 먹여서 기절해버렸고 이제서야 일어났다고 말했다.
기차표든 호텔 숙박권이든 아무거나 출장 내용을 증명해 보라는 J의 요구에 당연히 남자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J의 진흙탕 후기를 듣고 나서 깨달았다.
나는 이번 생에 사랑하긴 글렀다는 사실을...
나 또한 올해 어렵게 시작한 연애에 실패했다.
사랑이라는 환상에 빠지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풋사랑을 하던 학창 시절부터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도합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수많은 데이터가 쌓이면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보이고,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최악의 사태가 온 것이다.
모르는 상태에서 알고 싶지 않다면 들추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많은 걸 알아버린 상태에서 알고 싶지 않다면 누군가 프라이팬으로 내 뒤통수를 세게 내리쳐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 지난주 주말 소개팅 자리 -
햇살 가득 내리쬐는 테라스에서 남자는 의아해하며 내게 물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연애할 수 있었을 텐데.. 왜 혼자세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려서요"
내가 대답했다.
남자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공감해요 저도 그렇거든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죠?"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쎄게 내리치면 리셋되지 않을까요?"
나의 엉뚱한 대답에 남자는 한참을 웃다가 대답했다.
"그럼 프라이팬 가져와서 서로 한 대씩 내리친 다음에 다시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주물팬은 안돼요~ 죽긴 싫으니까"
상처를 입더라도 어리석었을 때가 훨씬 좋았다.
확실히 인생은 "환상"이라는 감미료가 들어가야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