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흐린 기억 속에도 사랑은 존재했다.
♪언젠가 나의 왕자님은 꼭 올 거예요♪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겠죠♪
♪그리고 그의 성으로 함께 갈 거예요♪
백설공주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파이 반죽을 밀대로 밀자 작은 새가 날아올라 꽁무니에 얹은 밀가루를 솔솔솔 뿌려주었고 파이 주변엔 귀여운 다람쥐들이 모여들어 기웃거린다.
♪영원히 행복하기 위해 나는 알아요♪
♪언젠가 봄이 찾아오면 우리의 사랑을 찾게 되겠죠♪
백설공주가 파이 틀에 반죽을 올리니 작은 새들이 올라가 반죽 끄트머리를 총총총 밟아서 예쁜 모양을 내주고 파이 위에 필기체로 Grumpy를 그려주면 백설공주표 딸기 파이 완성!
90년대 초반, 흐린 기억 속의 어느 날
다섯 살이었는지 여섯 살이었는지도 희미한 어린아이였던 나는 TV 앞에 앉아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를 홀린 듯이 보고 있었다.
"새들이 만들어주는 딸기파이라니.. 당장 먹어보고 싶어"
태어나서 구경도 못 해본 미지의 음식을 보며 꼬마는 군침을 삼켰고 그게 어떤 맛인지 오늘 안에 꼭 알아내야만 했다.
그때 엄마 아빠가 오더니 작은 원피스를 건네며 내게 말했다.
"어서 옷 입자~ 오늘은 결혼식에 갈 거야"
결혼식 → 뷔페 → 음식이 엄청 많음 → 그중에 딸기파이가 있을 것임
이런 엉뚱한 의식의 흐름을 거쳐 딸기파이를 먹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나는 너무나 기뻐 소파 위에서 폴짝폴짝 뛰어댔다.
예식장에 도착해서도 온통 딸기파이를 먹을 생각에 들떠있던 나는 엄마 아빠를 보채기 시작했다.
"빨리 딸기파이가 먹고 싶어! 어서 뷔페로 가자아~"
그렇게 끈질기게 떼를 써서 엄마 아빠를 뷔페까지 끌고 온 나는 뷔페 구석구석을 누비며 딸기파이를 찾아 헤맸다.
"자리에 얌전히 앉아서 기다릴래? 아빠가 찾아볼게"
나의 산만함에 지친 아빠는 딸기파이를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자리에 앉혔고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테이블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며 아빠를 기다렸다.
얼마 뒤 아빠가 접시를 들고 왔는데 접시 위에는 딸기케이크가 있었다.
"이게 아니야!!! 케이크 말고 파이란 말이야!! 백설공주가 만든 거랑 똑같은 걸 가져오란 말이야!! 으앙!!!!"
나는 싸이렌과 맞먹는 울음을 터트렸고 엄마 아빠는 딸기파이를 구해오지 못한 죄로 나를 안고 밖으로 나가 한참을 달래야 했다.
"아빠가 미안해.. 아무리 찾아봐도 딸기파이가 없는걸? 집에 가면서 꼭 찾아줄게"
나는 아빠의 억울한 사과를 들으며 조금 더 기다려 주기로 했다. 이미 마음이 상해버려 다른 음식은 먹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어른들의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지루한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집에 갈 시간
나는 아빠 손을 꼭 부여잡고 다시 한번 말했다.
"이제 딸기파이 찾아줘"
"응 찾아줄게 걱정하지 마"
가여운 아빠는 빌어먹을 백설공주가 만든 똑같은 모양의 딸기파이를 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90년대 한국의 동네 빵집에서 그런 걸 팔 리가 없었다.
몇 번이나 차를 세워 빵집에 들어가 딸기파이를 찾아봤지만 있을 리 없었고 그렇게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아이가 아니었다.
"빨리 딸기파이를 내놓으란 말이야 으앙!!!!!!!"
나는 책상에 엎드려 나라를 잃은 듯이 꺼이꺼이 울어댔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울었던 것 같다. 숨쉬기가 버겁고 머리가 띵해질 무렵 아빠가 방으로 들어오더니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서영아 아빠가 파이 구해왔어 어서 먹어봐"
"거짓말하지 마!! 또 케이크잖아!! 파이는 없어"
"아니야 정말 파이야 열어봐"
나는 아빠한테 속는 셈 치고 상자를 열어보았는데 상자 속에 있는 정체 모를 파이는 내 머릿속에 백 개의 물음표를 만들어냈다.
오돌토돌한 갈색 알갱이들이 빼곡하게 올라가 있는 정체 모를 둥근 빵인데 가장자리는 백설공주의 파이처럼 물결 모양의 파이 형태를 이루고 있다.
"아빠 이게 딸기파이야..?"
"아니 이건 호두파이야~ 딸기 파이는 아니지만 파이잖아~ 어서 먹어봐 정말 맛있데!"
비록 딸기 파이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 울 힘이 남아있지 않았던 나는 아빠가 건네주는 파이를 한입 베어 물었는데 그동안 먹어보지 못했던 신기하고도 오묘한 맛이었다.
"생각보다 맛있네?"
"맛있지?? 이게 더 맛있는 거야! 아빠가 정말 어렵게 구해왔어"
그건 내가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피칸파이"였다.
그로부터 30년이나 흘러버린 오늘,
파이는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이 돼버렸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 쇼케이스에도 먹음직한 파이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렇게 온 동네를 뒤지며 찾아 헤맸던 파이는 이젠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당장 딸기파이를 대령하라고 목청껏 울어대던 나를 달래주던 엄마와, 온 동네를 뒤져 피칸파이를 찾아온 아빠는 사라져 버렸다.
심술궂은 꼬마의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묵묵히 받아주던 엄마 아빠는 하룻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
29살 겨울,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건넸던 사과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현관문을 벌컥 열고 집을 나서던 순간
그 마지막 순간은 그대로 박제되어 6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시뮬레이션 되고 있다. 질리도록 보아서 대사까지 외워버린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때의 나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나 혼자 알아서 큰 줄 알았고, 나에게는 부모라는 비빌 언덕이 애초부터 없었다고 생각했으며, 피가 섞인 동생들만큼 사랑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당신의 사과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애 첫 피칸파이를 먹어본 흐린 기억 속의 어느 날, 나는 당신에게 말도 안 되는 어거지를 부리며 하루 종일 떼를 쓰고 있었는데
어리광 부려야 하는 나이에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며 자랄 수 있게 해 준 당신의 은혜는 천금으로도 감히 갚을 수 없다는 걸 그땐 미처 몰랐다.
카페 카운터에 서서 커피를 주문하고 있는 나에게
쇼케이스 속에 있는 피칸파이가 날카롭게 속삭였다.
"너 혼자 알아서 컸다고? 웃기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