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변수
"어서 오세요"
나른한 토요일 아침, 뷰티샵에 들어서자 남자가 웃으며 맞이했다.
포마드 헤어에 수트를 입고 위에 가죽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그는 뷰티샵보다는 바버샵이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내가 그를 찾아온 이유는 눈썹 문신을 하기 위해서다. 1년 전에 했던 눈썹 문신이 거의 흐릿해져 아이브로우 펜슬로 덧그리며 버티고 있었는데 워낙 먼 거리에 있는 이곳까지 오려면 큰맘 먹고 여행(?)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서야 왔다.
이렇게 먼 곳까지 굳이 찾아오게 된 이유는 그의 기술력 때문이었다.
입소문으로 알게 된 이곳은 괜히 소문이 난 게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눈썹 결을 그려 부자연스러움을 최소화하는 게 그가 가진 고오급 기술이었다.
그는 내 눈썹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물었다.
"전에도 여기서 하신 거예요?"
"네 여기서 했어요"
"얼마나 되셨죠?"
"한 일 년 정도 됐을걸요?"
"성함 좀 알려 주시겠어요?"
그는 태블릿 PC를 가져와 검색하더니 금세 나의 기록을 찾아냈다.
"두 번째 오신 거네요? 작년 3월에 오셨어요 1년 아직 안 되셨네요"
"그래요? 1년 넘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되진 않았네요"
"네 10개월 정도 됐네요~ 여기 앉아보시겠어요?"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빠른 속도로 눈썹 모양 틀을 쓱쓱 그려나갔다.
마치 데자뷰처럼 똑같은 의자에 앉아 똑같은 남자에게 똑같은 눈썹을 내어주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10개월 전인 2021년 3월로 돌아온 것 같았다.
"틀은 다 잡았어요 누워 보시겠어요?"
"네"
그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머리맡에 앉아 미리 그려놓은 틀에 맞추어 눈썹을 한올한올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그가 어젯밤에 과음을 하진 않았을지, 아침을 거르고 와 오랜 공복 상태가 아닐지 걱정스러워졌다. 그로 인해 갑작스럽게 찾아온 수전증으로 내 눈썹을 망쳐버려 포청천이 돼버린 내 모습을 들여다보며 거울 앞에서 절규하는 최악의 상상 속에서 그가 실수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이 시점부터 데자뷰 같았던 10개월 전 상황과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눈썹 문신을 하는 도중에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거다.
"근데 무슨 일하세요?"
나는 그의 팔꿈치에 얼굴이 눌린 채로 대답했다.
"회하원이어" (회사원이요)
"아 회사원이시구나~ 직장이 어디예요?"
"븐당이어 (분당이요)"
"와 멀리서 오셨네요? 여기 어떻게 아신 거예요?"
"칭그소개로어 (친구소개로요)"
그가 대화에 정신 팔려 내 눈썹을 포청천으로 만들고 있진 않는지 불안에 떨고 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끝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15분가량의 짧은 시술 시간 동안
그가 원래 이 샵에서 차로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아주 먼 곳에서 살았는데 최근에 샵과 3분 거리인 가까운 곳에 집을 얻었다는 사실과, 샵에 출근하기 전에 매일 아침 한강에 가서 조깅을 할 수 있어 삶의 질이 올라갔다는 사실과, 반면 이 동네는 친구들이 아무도 없어서 외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분명 10개월 전에는 나에게 단 한마디도 걸지 않고 묵묵히 시술만 하던 그가 오늘따라 다른 사람처럼 살갑게 말을 걸어오니 어안이 벙벙했다.
"다 끝났어요~"
나는 그의 말에 벌떡 일어나 그가 내어주는 손거울을 들어 눈썹을 확인했다. 다행히 나는 포청천이 되지 않았고 잠시 동안 머릿속에 그려왔던 최악의 상상들은 잘게 흩어져 순식간에 증발했다.
"감사합니다~ 잘 됐네요 마음에 들어요"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고 아우터를 입으며 그를 따라 카운터로 걸어갔다.
"15만 원입니다~"
"여기요"
"감사해요~ 연고 발라드릴게요"
그가 연고를 짜서 내 눈썹에 발라주는데 10개월 전에 왔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다정함이 손길에서 묻어났다.
"시술 후 주의사항은 카톡으로 보내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와 인사를 나누고 샵을 나와 걸어가는데 그에게 시술 후 주의사항과 함께 뜻밖의 내용이 담긴 카톡이 왔다.
"저 9년 동안 일하면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괜찮으시다면 개인 톡으로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남자친구분이 계시다면 큰 실례가 돼서 조심스럽게 여쭈어봅니다.."
그의 카톡은 꽤나 놀라웠다.
뜻밖의 고백이 놀라운 게 아니라 10개월 전의 그의 모습과 너무나도 대조됐기 때문이었다.
시술 내내 말 한마디 걸지 않았고, 계산할 때 현금이 없어서 카드를 내미는 나에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그였다.
당시 그에게 나는 카드로 계산하는 센스 없는 손님이었는데
오늘 그에게 나는 단골을 잃는 리스크를 감안해서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똑같은 여자
똑같은 장소
똑같은 행동
모든 상황이 10개월 전이랑 똑같았는데
대체 어느 부분에서 이런 변수가 생긴 걸까?
우선 10개월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똑같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고 성형이나 시술 같은 눈에 띄는 외모 변화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특별히 친절하게 행동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해주었을 뿐이다.
똑같은 여자를 똑같은 장소에서 만나 똑같은 시간 동안 똑같은 시술을 해주었는데 그의 마음이 요동쳤던 이유는 오로지 그의 내면 속에 있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동네에서 아무 연고 없이 외로워진 그만의 타이밍은 "빈차"라는 등을 켜놓은 택시와도 같지 않았을까?
손님이 내리고 텅 빈 그의 차에는 빈차라는 등이 켜졌지만
나는 이미 불러둔 콜택시가 있어 타지 않았다.
나에게 오늘은
어렵게 찾은 단골집을 잃은 날이었고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을 정말 싫어하는데
인정할 수밖에 없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