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수많은 소개팅에 실패했던 이유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에 결혼정보회사 커플 매니저한테 연락이 왔다.
9개월 동안 수많은 소개팅을 해줘도 딱히 실적을 내지 못했던 나는 이미 결정사에서 오래전부터 내논 자식이었고 나 또한 그들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좋은 분이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잘 맞는 분이실 거예요"
잘 맞는 분이라..
매니저에게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 호기심이 생겼다.
- 평일 오후 7시
퇴근하고 약속시간에 맞춰 결정사에서 정해준 커피숍으로 갔다.
커피숍 앞에 남자분이 서있었는데 하얀 피부에 말끔한 옷차림을 한 훈훈한 남성분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들어가요"
그렇게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는 오늘이 첫 만남이라고 했다.
"제가 첫 경험이네요?"
"네 그래서 떨려요"
결정사 9개월 짬밥의 내논 자식은 이제 갓 입성해서 한껏 긴장한 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여기 처음 상담하던 날 매니저분께서 첫 번째로 떠오르는 분이 있다고 추천하셨는데.."
"그게 전가요?"
"네 (웃음)"
신기하게도 그를 담당하는 매니저와 나를 담당하는 매니저가 다른 사람인데 나를 본 적도 없는 그의 담당자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첫 번째 상대로 나를 추천했다는 게 신기했다.
결정사 내부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지만 그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잘 맞는 분"이라는 수식어가 나온 이유가 점점 명확해지며 놀라웠다.
우린 처음 본 사이였지만 비슷해도 너무 비슷한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저는 체계적인 걸 추구해서 제 MBTI 별로 안 좋아하는데.. ENFP에요"
"왜요? 전 좋은데 저도 ENFP에요!"
"어떤 전공을 하셨어요?"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어서 광고홍보과를 전공했어요 결국 전공은 못 살렸지만 글 쓰는 건 여전히 좋아해요"
"저랑 반대지만 비슷하네요 저는 미술 전공인데 지금은 광고대행사에서 디자인 업무를 해요"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이상형은 따로 없어요 그 사람만의 느낌을 보는 것 같아요"
"저도요 저는 보자마자 스파크가 튀는 사람이요"
그림체부터 똑 닮은 그와 나는 비슷비슷한 부분들이 참 많았다.
그런 그와 의견 조율조차 필요 없다고 느낄 때면 환상의 짝꿍 같다가도, 생각이 너무 똑같아서 살짝 징그럽다가도, 그와 만나게 되면 고장 난 브레이크처럼 영원히 함께 달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아무래도 내가 엑셀 같은 여자라면 브레이크 같은 남자를 만나야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식어버린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간다.
"배고픈데 치맥 할래요?"
생각 더미에 파묻혀버리기 전에 질러야 할 것 같았다.
이 소개팅의 갑갑한 프레임을 깨버리고 그를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보고 싶었다.
"오 좋아요!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지금 갈까요?"
"어디로 갈래요?"
"나가서 찾아봐요 근처에 있겠죠"
"그래요"
그는 반가운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즉흥적인 사람들끼리 만났으니 갑작스러운 2차 협의 또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치킨집에 도착해서 후라이드 한 마리와 생맥주 두 잔을 주문한 뒤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분명 호감 가는 외모에 성격도 나랑 비슷한데 눅눅한 후라이드와 김 빠진 맥주처럼 무언가 완벽하게 들어맞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소개팅 많이 해보셨어요?"
"많이 해봤죠"
"잘 될 때도 많았어요?"
"아니요~ 100번 했다고 가정하면 한 2~3번 정도? 그마저도 오래 못 갔어요"
"저랑 똑같네요"
"그래요? 우린 소개팅 체질이 아닌가 봐요"
"왜 소개팅은 잘 되기 힘든 걸까요?"
"짧은 시간 안에 결정해야 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마음에 들면 짧은 시간 안에도 결정할 수 있거든요"
"음.. 그럼 뭘까요?"
우린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곰곰이 생각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소개팅들을 실패하면서 막연히 품고 있던 의문을 제대로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치킨이 나올 때쯤, 갑자기 뇌리에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정답같이 느껴졌다.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뭔데요?"
"우연히 처음 마주하는 그 순간의 특별한 스토리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어? 맞는 것 같아요! 그런 기적 같은 스토리가 애초부터 생략된 거니까"
특별한 스토리는 관계에 있어서 엄청난 힘을 불어넣는다.
드라마만 봐도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바람에 휩쓸려 북한에 불시착한 재벌 상속녀가 우연히 마주친 북한 장교와 사랑에 빠지는 "사랑의 불시착"이나
톱스타 여배우와 지구인으로 위장한 외계인이 옆집에 살면서 사랑에 빠지는 "별에서 온 그대" 처럼 주인공들이 처음 마주하는 시점부터 스토리에 바짝 힘을 주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드라마처럼 요상하고 거창한 스토리는 아니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분명 기적 같은 잔잔한 스토리들이 존재한다.
그 특별한 스토리 속에서 만난 사람과 인위적인 자리에서 만난 사람을 어떻게 견줄 수 있을까?
만약 그를 결정사에서 정해준 커피숍이 아닌 이곳 치킨집에서 우연히 마주쳤더라면
내가 그의 앞에 있는 맥주잔을 실수로 엎어버리고 그에게 세탁비를 물어주기 위해 연락처를 건넸더라면
그렇게 수많은 우연들을 제치고 기적 같은 스토리로 우리가 시작되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연인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음날 아침 매니저에게 연락이 왔다.
"어제 만난 남성분 마음에 드셨나요? 한 번 더 만나 보시겠어요?"
"좋은 사람이지만 괜찮아요"
그렇게 나의 소개팅은 어김없이 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