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떠난 3박 4일간의 게으른 춘천여행
비 내리는 춘천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한 손에는 캐리어를 힘겹게 끌고서 호스텔 앞에 도착했다.
잿빛 하늘과 빈티지 연노란색 호스텔 건물이 생각보다 잘 어우러져 우산을 들어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문을 열고 1층 프론트에 들어섰는데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부재시 연락처가 쓰여있길래 전화를 걸었더니 중년 남성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체크인하려고요"
"네 잠시만요"
이윽고 희끗희끗한 머리의 중년 남성이 나타났는데 아마도 이 호스텔의 주인인가 보다.
"키는 여기 있고요, 식사는 1층 다이닝룸에서 하시면 됩니다."
나는 그가 건넨 키를 받아 들었다.
403호, 앞으로 3박 4일간 나는 403호 투숙객으로 불리울 것이다.
서울 근교인 춘천에서 나흘이나 머무르는 이유는 단지 쉬고 싶어서였다. 춘천은 4년 전 여름, 아무 계획도 없이 홀로 떠났던 여행지였는데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 언젠간 다시 오고 싶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애인 K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혼자 책이랑 노트북 들고 간단하게 춘천을 다녀오고 싶습니다. 머리도 식히고, 글도 쓰고, 영감도 얻을 겸, 숙소는 안전한 데로, 저녁에 돌아다니지 않는 조건으로요!"
"며칠???"
"보통 7박 8일 정도로 혼여를 다녔지만 오빠의 심려를 감안하여 아주 간단하게 3박 4일로 다녀오겠습니다. 승인 재가하여 주십시오!"
"음.. 여행의 명분은 좋은데.."
망설이는 K에게 숙소의 위치를 인증하자 승인하겠다는 회신이 돌아왔다.
익숙한 장면이다. 애인이 있었을 때도 종종 홀로 여행을 다녔으니까. 혼자 놀고 싶어서 일부러 두고 간 건 아니고 대부분 바쁜 남자들을 만나와서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내 팔잔가보다.
"딸칵" 403호의 문이 열렸다. 카드키가 아닌 열쇠로 문을 따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혼자 쓰는 방이니 싱글룸으로 잡았는데 작은 방이지만 노란 조명과 새 하얀색 침구가 제법 아늑해 보인다.
비 와서 나가긴 싫은데 배는 고파오고 벌써 저녁시간이라 첫날의 일과는 닭갈비에 막걸리 한잔하는 걸로 마무리하려 한다.
황당하지만 이번 여행은 이렇게 할 거다.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최대한 느슨하게
늦가을의 비 오는 춘천은 제법 쌀쌀했다.
옷깃을 여미며 닭갈비 골목으로 들어서자 매캐한 숯불에 닭갈비를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한 명이요!"
자리를 잡고 숯불 닭갈비 2인분에 막걸리를 시켜서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 손님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본다.
하긴, 신기할 수 있겠다. 혼자 고기를 구우며 술을 곁들일 정도면 혼밥 레벨에서 만렙을 찍었다는 건데 혼여행이 일상인 나에게는 평범한 저녁이지만
옆 테이블 사람들 눈에는 아주 못된 놈한테 실연을 당했다던가 or 닭갈비가 미친 듯이 먹고 싶었지만 함께 먹을 사람을 구하지 못한 여자로 보겠지
어느 쪽이든 비운의 여자라는 건 확실하다.
뭐 누가 어떻게 보던 상관없다.
빗소리와 숯이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기가 막힌 막걸리에 야들야들하게 잘 구워진 닭갈비를 한입 먹으니 비 오는 날 성가신 캐리어와 함께했던 고된 하루를 충분히 보상받았다.
이렇게 첫날 일정이 끝났으니(?) 알딸딸한 기분에 취해 호스텔로 돌아왔다.
내가 이 호스텔을 숙소로 정한 이유는 1층에 예쁜 카페가 있어서였다. 여행지에서 영감도 얻고, 수필도 쓰고 싶었는데 호스텔 내부에 카페가 있으니 늦은 시간까지 안전하게 집필이 가능하다는 게 가장 큰 메리트였다.
초저녁인데도 텅 비어있는 카페에 들어서니 긴 생머리에 여리여리한 여자분이 구석에서 고양이 두 마리에게 낚싯대 장난감을 흔들고 있었다. "딸랑딸랑" 정적이 흐르는 카페에서 그녀가 흔드는 낚싯대에 달린 방울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저 여기서 노트북 하려는데 커피.."
내가 커피를 주문하려 하자 여자가 돌아보더니 이야기했다.
"커피 안 시키셔도 돼요 아무 데나 앉으세요"
내가 자리를 잡고 노트북 꺼내자 여자는 내 자리로 걸어와 테이블 옆에 있던 무드등을 켜주고는 고양이들에게 돌아가서 낚싯대를 마저 흔들었다.
한참을 흔들던 여자는 지쳤는지 카페를 나갔고 나는 홀로 남아 키보드를 두들기는데 심심해진 고양이들이 내 자리로 모여들었다.
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가 내 옆을 알짱거리는데 일이 잘 될 리가 없다. 두드리던 키보드를 멈추고 고양이에게 손을 흔들며 관심을 구걸했다. 내겐 낚싯대가 없으니 현란한 손놀림으로 꾀어내야만 한다.
한 녀석이 드디어 내 손을 탔다. 내 손바닥에 등짝을 갖다 대고는 이리저리 부비는데 털이 보드라워서 감격스럽다. 빈손에 초면인데 인심 좋은 녀석이다.
그렇게 글은 뒷전으로 미루고 고양이들이랑 노닥거리다가 방으로 올라왔다. 낯선 침대에서 잠을 설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우리 집보다 더 아늑해서 밤새 꿀잠을 잤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오로지 쉼이었기 때문에 무계획으로 잠들고 아침에 눈을 뜨면 처음으로 하고 싶은 걸 했다.
그래도 평일에는 오전 6:30분에 기상하던 습관이 있어 알람 없이도 7시 즈음에 자동으로 눈이 떠졌고 침대에서 여유롭게 꼼지락대려고 마음먹어도 막상 8시가 넘어가면 아침을 통째로 날려먹을까 봐 마음이 조급해진다.
나는 의식적으로 계획 없고 느리게 움직였다.
첫째 날은 닭갈비와 막걸리를 먹고 와서 고양이를 쓰다듬었고
둘째 날은 반나절은 카페에서 책을 읽고 나머지 반나절은 남이섬에 가서 산책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셋째 날은 카페에서 책을 읽고 시골길을 좀 걷다가 다른 카페에 가서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마지막 날은 손바닥만 한 김유정 마을에서 하루를 다 썼는데 대낮부터 황태구이에 막걸리를 한잔하고 故김유정 작가의 흔적을 아주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런 게으른 여행이 성립되려면 우선 혼자 떠나는 여행이어야 하고, 이미 와봐서 가볼 데는 다 가본 여행지여야 하며, 일정이 길어서 시간적 여유가 넘쳐야 가능하다. 나에겐 그게 딱 춘천이었다.
마치 유튜브 영상의 재생속도를 0.75배로 늦춘듯한 슬로우 여행이었지만, 빈티지 연노란색 호스텔로 들어서면 시간은 0.5배로 더 느리게 흐른다.
호스텔 프론트는 대부분 공석으로 주인아저씨는 보이질 않았고 데스크 위에는 날짜 지난 신문들만이 한가득 쌓여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1층 카페는 애초부터 운영하지 않았다. 그저 고양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가 되거나, 가끔은 카페 구석에 있는 책상에서 긴 생머리 여자가 헤드셋을 낀 채 공부를 하고 있다.
부녀로 추정되는 아저씨와 여자는 손님과 마주쳐도 특별히 살갑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티비를 보거나 고양이들에게 낚싯대를 흔들 뿐이었다.
매일 저녁 텅 빈 카페에 홀로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들은 말없이 내 옆에 있는 무드등을 켜주고 사라질 뿐이었다.
난 살갑지 않은 그들이 더 좋았다. 카페 한켠에 놓여있던 킨포크 잡지 같았기 때문이다.
친척, 친족을 뜻하는 킨포크(kinfolk)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느리고 여유로운 자연 속의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라이프를 담은 매거진인데 느리고, 여유롭고, 진짜 가족처럼 살갑지 않은 이곳이 나에겐 킨포크 라이프처럼 느껴져서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마지막 날 짐을 꾸리는데 12시 체크아웃 시간을 넘겨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가 시간 약속을 못 지키다니.. 부랴부랴 짐을 싸서 급하게 1층으로 내려왔더니 무색하게도 프론트는 오늘도 텅 비어있다.
나는 주인아저씨한테 전화를 걸었다.
"403호 체크아웃하려 하는데요 캐리어를 맡길 수 있을까요?"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각인데 주인아저씨는 막 잠에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카페 아무 데나 두고 다녀오세요"
늦은 저녁, 나흘간 정들었던 게으른 연노란색 호스텔을 벗어나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기차가 속력을 내며 느리게 흐르던 시간도 점점 빨라진다.
0.5배속 → 0.75배속 → 기본 → 1.25배속 → 1.5배속 → 1.75배속을 거쳐 2배속에서 살고 있었던 K를 만났다.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만난 K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하루 안에 광주와 화순에 출장을 다녀와서 바로 사무실로 복귀하고 늦은 밤까지 직원들과 회의를 하다 말고 뛰쳐나온 그는 정신없이 흘러간 버거운 하루를 감당하느라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비로소 출출함을 느꼈다.
"아 배고프다.. 오늘 정말 힘든 하루였어.. 왜 이러고 살아야 할까?"
나는 지친 그의 손에 403호 키를 꼭 쥐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