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아도 결혼하는 사람들
나른한 토요일 오후, 뜬금없는 인물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작년에 딱 한 번 봤던 사인데 아는 동생이 친구로 지내라며 소개해 주었다. 동갑이다 보니 고민도 비슷해서 원래 알던 남사친처럼 즐겁게 이야기하다 헤어졌었다.
"여보세요? 오랜만이네~"
"안녕~ 나 오랜만이지? 간만에 생각나서 전화했어"
"너 얼마 전에 결혼했더라? 정말 축하한다"
"아.... 어어... 고맙다 너는 안 해? 너도 해야지~ 아니 다름이 아니라 우리 술 한잔하러 가고 있는데 지금 올 수 있어?"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좀 그렇네 다음에 봐"
"에이 정말 그러기야?"
"미안~~"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넸더니 치부를 들킨 듯 당황하는 그였다. 전화를 끊고 그의 카톡 프로필을 찾아보았는데 풍경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식 올린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새신랑의 프로필 사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결혼은 동생이 소식을 전해줘서 알게 되었는데 결혼식 사진을 보고 눈의 휘둥그레졌다. 신부 외모가 전혀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를 고작 하루 보긴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승무원과 연애 중이었다. 어찌나 여자 친구 자랑을 하던지 사랑꾼이 따로 없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외모 기준이 명확하고 구체적이었는데 여자 친구가 본인의 이상형이라면서 사진을 보여주며 뿌듯해했다.
여자 친구에게 어떤 이벤트를 해주면 좋을지 묻길래 센스 있게 할 수 있는 이벤트를 몇 가지 알려주었더니 뛸 듯이 기뻐했던 사랑의 팔불출이었다.
그게 고작 작년이었는데 그렇게 사랑했던 승무원 여자 친구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갑자기 본인과 같은 직업인 변호사와 그새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연애를 하면서 뒤에서는 틈틈이 집안에서 권하는 맞선을 받다가 스킨십 정도는 가능한 조건 맞는 여자를 찾아서 서둘러 연애를 접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승무원 애인은 사랑이었고
변호사 와이프는 진로였다.
그는 때가 되니 진로를 선택하였다.
이런 경우를 주변에서 수없이 많이 봐왔는데 매번 놀랍다. 나는 사랑하는 감정이 없는 사람과의 여행조차도 엄두가 안 나는데 어떻게 사랑하는 감정이 없는 사람과 평생 한 이불 덮고 살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지 정말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밖에서는 치열하게 살아도 집이라는 공간만큼은 모든 걸 무장해제하고 가장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는데 그 공간에 마음 가지 않는 사람이 매일 살고 있으니 당연히 밖으로 나돌며 방황할 수밖에 없다.
막상 식을 올리고 나서 매일 한 이불을 덮어보니 현타가 온 거고 헛헛한 마음에 카톡을 뒤져 이 여자 저 여자 연락을 해봤을 거다. 그중 일 년 전에 딱 한 번 봤던 나에게 당장 나오라고 전화했겠지
이런 부류는 대부분 결혼을 해도 싱글 인척 하며 평생을 방황하는데 정말 딱한 케이스다. 당사자에게 속 사정을 들어보면 대부분 부모님께 물려받을 재산 때문에 타협하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현빈 대사 중에서
"결혼은 인수합병 차원의 일생일대의 비즈니스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대사였다.
변호사 와이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나에게도 딜레마를 빠지게 했던 변호사가 생각났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나온다.
그날은 금요일 저녁이었다. 여의도에서 퇴근 후 합정에서 소개팅 약속이 있었는데 마침 같은 건물에서 일하던 내 중학교 절친도 합정 근처에서 소개팅이 있었다.
퇴근 시간도, 가는 장소도 비슷해서 동행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왠지 나랑 헤어지고 혼자 가는 게 싫었는지 소개팅남에게 급하게 연락해서 내가 가는 소개팅 장소로 변경했다. 게다가 무슨 우연인지 그녀와 나의 그날 소개팅남 직업은 둘 다 변호사였다.
우리가 먼저 도착해서 식당 2층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고 그녀와 나는 각각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일행이 아닌 척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되자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정형돈 진상 컨셉 스타일로 나왔던 은갈치 정장에 똑같은 크로스백을 멘 남자가 2층으로 올라왔다. 그는 그녀와 내가 앉은 테이블을 번갈아서 쳐다보다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안소율씨 맞으신가요?" 물었다. "아닌데요?" 멋쩍은 은갈치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면서 친구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동공이 흔들리는 절친의 표정을 실시간 라이브로 보니 너무 웃겨서 입을 틀어막고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오더니 "혹시 소개팅..?" 하고 물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인상 좋은 그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수수하고 웃을 때 인상이 참 좋았다. 사법고시 출신 변호사로 변호사들 사이에서도 수재였다. 소송건이 생긴다면 그에게 꼭 맡기고 싶을 정도로 한눈에 봐도 믿음직하고 신뢰 가는 스타일이었다.
은갈치 크로스백 소개팅남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던 건너편 테이블 절친에게 카톡이 왔다.
"너 소개팅남 괜찮은데?"
대화를 해보니 더 괜찮아서 그 뒤로 그와 다섯 번이나 만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머리로는 호감이 생겼는데 심장이 반응을 안 한다. 아무리 만나보고 만나봐도 똑같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다섯 번째 만난 날, 그는 마음이 조급해졌는지 나에게 물었다. "혹시 좋아하는 남자 옷 스타일이 있어? 브랜드를 알려주면 거기서 추천받고 쇼핑하려고"
그의 스타일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호르몬이 반응을 안 했다.
그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직 사귀지도 않는데 결혼 생각을 한다며 내가 모아 놓은 돈, 학벌, 집안 등을 물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지만 감출 것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 모두 이야기했다. 나의 가족사, 모아 놓은 돈, 그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는 학벌
그는 다 듣고 나서 환하게 웃으며 모두 상관없다고 했다. 혼수도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본인이 다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는 정말 사랑만 있으면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사랑이 아닌 진로였다.
결혼은 현실이라 하지만 매일 집에 가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밥을 먹고 평생 한 이불을 덮어야 하는 것도 현실이다.
나는 그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 후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일 년 전 은갈치와 소개팅했었던 절친이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그녀는 갑자기 뜬금없이 잊고 살았던 그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 아까워 그때 그 변호사 말이야 그렇게 스펙도 좋은데 인상도 좋고 겸손하고 진중하고.. 그리고 요즘 남자들 다 계산적인데 그런 사람 다시는 못 찾을지도 몰라! 한 번만 더 만나봐 봐! 진짜 널 생각해서 그래"
"됐어 지난 일이야 그때 만나볼 만큼 만나봤는데 아니었어"
"일 년이나 지났잖아 그가 또 어떻게 바뀌었는지 몰라 딱 한 번만 더 만나봐 봐"
"싫어"
그녀는 결국 사고를 쳤다.
나에게 할 게 있다고 핸드폰을 빌려 가더니 기어이 그를 찾아내서 안부 인사를 건네고 만나자고 카톡을 보내 놓았다.
그는 바로 답장이 왔고 정말 반가워하며 바로 날을 잡았다. 친구가 대신 보낸 카톡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어서 그를 일 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일 년이 지나고 만난 그는 그때보다 더 세련되지고 여유로워 보였다.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고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렇게 그를 두 번 더 만났다.
하지만 역시 심장은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에게 두 번째 작별을 고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
나는 천하의 나쁜 년으로 남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배우자를
진로라는 섹션에 절대 넣고 싶지 않다.
진로는 내 힘으로 개척해 나가는 거고
배우자는 온전히 서로에게 힐링이 되는
사랑의 섹션에 넣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글도 쓰고 돈도 벌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