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부림 전염병'이 스릴러보다 잔혹한 이유
신림역 칼부림 사건 이후로 고작 13일 만에 서현역 칼부림 사건이 발생했다. 조만간 모방 범죄가 발생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범죄의 스케일이 더 커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8/4(금) 오전]에 잠실에서 행인 20명을 죽이겠다는 살인 예고글을 읽으며, 예고한 일자와 예고한 시간에 정확히 잠실역으로 향하는 출근길은 공포 그 자체였다.
버스에서 내리니 사방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 갑자기 달려들어 나의 목덜미에 칼을 꽂는 상황을 상상하니 옆에 남자가 주머니에 손만 넣어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다.
정유정, 조선, 최원종 이 세 명의 살인마는 20대 청년층, 고립된 생활, 묻지마 살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불특정 사람들에게 휘두른 칼부림은 대한민국의 과열된 경쟁 사회에서 도태된 청년의 분노가 만들어낸 잔혹함이었다.
나도 매일같이 살인을 한다.
아침에 출근해서 모닝커피를 마시며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르고, 총을 난사하고, 자동차 부동액을 먹이고, 작살로 눈을 찌르고, 사시미 칼로 입을 찢기도 한다. 물론 시나리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살인이지만
나는 최대한 창의적인 살인을 고안하는데 온종일 시간을 쏟는다. 겉보기엔 시나리오 속의 살인이 요란해서 더 잔혹해 보이지만, 나의 살인은 오히려 현실보다 로맨틱해져 버렸다.
스릴러 시나리오는 초반에 흩뿌려둔 사건의 복선들이 퍼즐처럼 모두 이어져야 하고,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뚜렷한 범행 동기도 넣어야 한다. 그래야 기승전결이 들어맞으며 대중들이 좋아하는 시나리오가 탄생한다.
그러나, 요즘 묻지마 살인사건들은 '범행동기' 자체가 없다. 오로지 살인이 목적인 살인인 것이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욕구가 범행 동기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살해당한 부모에 대한 복수극, 사랑과 배신을 쓰는 나의 스릴러는 오히려 로맨틱해져 버렸다.
정유정이 살인 후 시체의 일부가 담긴 캐리어를 끌고 들뜬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CCTV를 보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사람을 죽여보고 싶다는 이유로 일면식도 없던 또래 여성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니.. 이렇게 시나리오 보다 현실은 심플하고 그래서 더 잔혹하다.
대체 왜 이런 묻지마 범죄가 급증하는 걸까?
기후 변화로 싸이코패스들이 갑자기 늘어난 걸까?
90년대에도 싸이코패스는 분명 존재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남자아이가 햄스터를 사서 죽이고 배를 갈라 보는 걸 즐기곤 했는데 그때는 나쁜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싸이코패스였다.
하지만 90년대의 범죄는 묻지마 살인사건의 비중이 확연히 적었다. 대부분 돈을 위한 납치와 살인이 주를 이루었고 범인은 잡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범인도 잃을 게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최근 신림역 칼부림 사건의 범인인 조선은 모든 걸 체념한 듯 순순히 체포되는 걸 볼 수 있다. 자신의 인생에 미련 자체가 없으니 저런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어차피 사회와 동떨어진 고립된 삶은 밖에 있든 감옥에 있든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을 거다.
20대인 이들이 성장한 시대와 나의 시대는 확연히 다르다. 나의 유년기는 모두가 비슷하게 살던 시절이었다. 어느 집에 가도 거실 벽에 뻐꾸기시계가 걸려 있었고, 부엌에서는 카레를 끓이는 냄새가 났으며, 아이들은 서로 이름도 모른 채 놀이터에서 만나 두꺼비 집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생일파티에 친구들을 초대하면 엄마는 양념치킨, 김밥, 잡채, 케이크를 한 상 차려주었고 친구들이 건네는 알록달록한 선물들의 포장지를 뜯어보면 크레파스나 장난감 같은 뻔한 것들이 나왔다. 그건 누구의 생일파티에 가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세상을 배우기도 전에 부모의 직업으로 급을 나누고, 서로 어떤 브랜드의 아파트에 사는지부터 따져대며, SNS에서는 다들 화려한 인생을 인증하기 바쁘다.
이런 세대에서 자란 아이들 중에 도태된 부류는 사회 자체에 분노를 품게 된다. 자신은 속하지 못한 남들을 위한 사회라고 생각하니 모든 것들을 증오하게 되고 결국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묻지마 칼부림이라는 테러로 이어져 버렸다.
신림역 칼부림 사건이 터지자 인터넷에는 칼부림을 예고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사회와 고립되어 그늘 속에서 살아왔던 청년층의 분노가 속속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서 부를 확인할 수 있는 척도가 온라인 활동이 활발할수록 가난하고, 오프라인 활동이 활발할수록 부자라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인터넷 게임과 넷플릭스를 보며 하루를 보낸다면, 부자들은 해외여행과 골프 라운딩으로 시간을 보내니 뼈아프게 맞는 말이다.
도태될수록 오프라인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사회,
온라인 속에서 분노하던 그들은 손에 칼을 쥐고 오프라인 거리로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그들이 오프라인 세계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수단이니까.
살인은 어떤 형태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정부에서는 더 강력한 처벌법으로 개선해야 한다. 외교 문제로 당장 사형제 부활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차라리 사형이 더 나을 정도의 가혹한 교도소 환경을 만들고, 감형 없는 무기징역을 하루빨리 추진해야 한다.
정부의 역할 외에도 우리도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위험에 자주 노출되어 봐서 주변을 살피는 게 습관화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전조증상이 보이면 자리를 바로 피하곤 하는데 지하철에 괴팍한 행동을 보이는 취객이 타면 바로 옆 칸으로 옮겨버린다. 아예 엮일 상황 자체를 안 만드는 거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옆에 앉아도 무심하게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설마 뭔 일이 일어나겠어?’라는 생각에 위험인자가 옆에 있어도 경계 태세를 갖추지 않는 것이다.
내 나이 열여덟,
새벽 1시에 독서실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던 길에 교복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마주친 남자에게 붙잡혀 어두운 골목으로 질질 끌려가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골목의 초입에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저항하자 차량 본네트 위에 눕히고 목을 조르던 남자의 광기 어린 눈, 정확히 기도를 짚고 온 힘을 다해 누르는 남자의 거친 손에 점점 의식이 흐려질 즈음에
근처 고깃집 사장님이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가 구해주셔서 겨우 살았던 그날의 끔찍한 기억은 나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세상
그게 내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때 이후로 낮이든 밤이든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핀다. 위기 상황에서 남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확률이 희박하다는 걸 깨닫고 난 뒤, 나를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류가 흐르면 바로 자리를 피한다.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의 안전한 치안을 자랑하는 국가라고 하지만 변수는 언제든지 존재하고 그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이제는 남성들마저 벌건 대낮에도 안전하지 못한 시대가 왔다. 우리는 주변을 항상 살피고 경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당분간은 칼부림 전염병이 돌 것이다.
전염병이 잦아들 때까지 인파가 많은 장소를 피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