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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Aug 17. 2023

출생의 비밀을 열지 않았다  

손서율 1세로 인생을 다시 시작하다.


점심시간, 대표님과 둘이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국수집에 가서 칼국수를 주문하고 앉아 있는데 대표님이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서율님은 형제가 어떻게 돼요?"

"저는 제 아래 쌍둥이 여동생이 두 명 있어요"

"그렇구나.. 저는 형이 한 명 있는데.. 부모님이랑 트러블이 있어서 걱정이 많아요"

"아.. 대표님이 중간에서 화해를 시켜줘야 하는 입장이겠네요"

"맞아요.. 의견 충돌이 심해서 조율하기 너무 힘드네요.."

"잘 알죠, 오히려 너무 가까운 가족관계일수록 응어리가 깊어서 풀기 쉽지 않거든요"


대표님은 나에게 가족 관계 개선에 대한 조언을 구했는데, 지인들의 고민 상담에서 항상 명쾌한 답변을 내려주었던 내가 처음으로 답변할 수 없는 고민이었다.


"서율님은 가족들이랑 사이좋죠? 성격이 좋으셔서 누구와도 잘 지내시니까"

"아니요. 저에게도 가족은 너무 어려워요"

"그래요? 전혀 안 그러실 것 같은데. 동생들이랑 안 친해요?"

"네.. 친하지 않아요"


7년간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살고 있는 내 사정을 모르는 대표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 이런 이야기는 술 한 잔 마시면서 해야 하는데! 대표님이 술을 전혀 안 드시니까 점심시간에 이런 딥한 이야기를 다 하네요"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잠실역으로 향하는 철도길을 따라 걸으며 대표님에게 나의 인생의 전말을 모두 털어놓았다.




"부모님이 7년 동안 아이가 없으셨어요, 그래서 저를 입양하셨죠. 저는 입양기관도 거치지 않고 개인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입양되었어요 이모가 중간에서 입양을 주선하셨죠"


대표님은 많이 놀란 표정이셨다.

"무슨 드라마 같네요.."


"스무 살이 되자 처음으로 엄마에게 출생의 비밀을 들을 수 있었어요. 저희 엄마가 나이가 많으시거든요 그런데 친엄마가 저와 나이 차이가 스무 살 밖에 나질 않는다는 사실도요"

"음.. 그런데 왜 입양을 보낸 거예요?"

"제가 너무 화가 났던 건.. 친엄마가 가난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대학생 때 덜컥 임신을 해버렸는데 엄마의 집안에서 아이를 입양 보내고 엄마를 미국으로 유학 보냈데요. 그 시절에 미국 유학 보낼 정도면 잘 사는 거잖아요? 그게 너무나 화가 났어요 저는 정말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입양을 보낸 줄 알았거든요"


이제 막 성인이 되자마자 엄마가 털어놓았던 나의 출생의 비밀은 충격적이었다.

충격이 채가시기도 전에 분노가 일었던 건, 친엄마의 집안이 부유했다는 거였다. 가난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면 나는 백번 이해하고 수소문해서 찾아가 봤을 거다. 하지만 생활고가 아닌 자신의 미래를 위해 내가 버려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TV에서는 해외로 입양된 사람들이 몇십 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부모를 찾아 나서는데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버리고 찾지도 않는 부모를 굳이 왜 찾아가서 조우해야 하는지..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도 오래전에 버렸던 자식이 불쑥 찾아온다면 그닥 반갑지 않을 것이다.


나는 친엄마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단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평생 친엄마의 존재를 모르고 살 줄 알았는데 이십 대 후반에 그 사람의 부고 소식을 엄마한테 전해 들었다.


"네 친엄마가 돌아가셨데 장례식장에 가볼래?"

"연락하고 있었어..?"


엄마는 이모를 통해 소식을 들은 건지 이미 장례식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나에게 도움이 될 게 있을까 싶어서 찾아가 보셨다는데 내 앞으로 남겨진 유산이 있는지 가보셨던 것 같다.


"혹시나 너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찾아가 봤는데, 가세가 많이 기울었더라고.. 장례식장을 가보는 건 네 선택인데 추천하지는 않아.. 오히려 이젠 너에게 짐이 될 것 같아서"


이상한 건 나를 낳아주신 엄마가 돌아가셨다는데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대상이 누군지라도 알아야 슬플 텐데 나에게 그 사람은 연기와 같은 미지의 존재였다.


그 사람의 장례식은 나의 뿌리를 들춰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내 출생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볼지 말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이다.


나는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았다.

미워할 대상이 뚜렷해지면 분노와 슬픔의 감정도 뚜렷해질 거고,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그 사람을 나 홀로 가슴에 품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서 첫 번째로 맺은 인연은 원래 없던 존재처럼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친엄마의 품에서 떨어졌지만 운 좋게 곧바로 두 번째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친엄마의 집안과 이모가 아는 사이였는데, 이모는 마침 자신의 여동생 부부가 7년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준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서류 한 장 없이 개인을 통해서 두 번째 가족의 아이가 되었다.


내가 입양된 지 3년 만에 부모님은 인공수정에 성공했고 쌍둥이 여동생이 생겼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나는 가족들 틈에 잘 끼지 못했고 이상하게 집에 오면 답답해서 숨이 막혔다. 동생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바로 엄마를 찾았는데 나는 모든 일을 혼자서 해결하는 게 당연해져 버렸다.


엄마와 동생들의 끈끈한 애착관계에 끼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던 나는 친구들에게 의지하기 시작했고,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통금시간이 엄격했던 집안의 규율을 어기기 일쑤여서 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매질을 했다.


동생들은 성격도 순하고 명문고에서도 전교 상위권 안에 들 정도로 성적이 월등히 뛰어났다.

나는 당연히 집안에서 미운 오리 새끼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더 삐뚤어져만 갔다. 그 간극은 점점 벌어지더니 어느새 나는 가족들 사이에 낄 수 없는 이물질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늦은 저녁, 엄마가 나를 주차장으로 불러냈다.


엄마는 차 안에서 나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털어놓았다. 사실은 내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입양아였다는 사실을.. 이어서 내가 성인이 되었으니 이제 부양의 의무가 끝났다고 이야기했다.


다음날, 가족들과 한자리에 모여 아침을 먹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사람의 집에 초대받아서 그곳의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날부터 평생을 남의 집에 껴서 내가 자라왔다는 게 점점 실감 나기 시작했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오랜 다툼에 지친 엄마는 나를 내보냈고. 나는 스물네 살에 혼자 나와 서른여섯이 된 지금까지 1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1인 가구로 살았다. 막상 혼자 살아보니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게 실감이 났다. 이십 대 초반 여자애가 홀로 삶을 꾸려나가기에는 세상은 너무 거칠었으니까.


내가 혼자 산다는 걸 알아낸 같은 팀 대리는 회식이 끝나고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박박 우겨대더니 싫다고 하자 길거리에서 강제로 입맞춤을 했다. 나는 그 정도로 누구한테나 만만한 존재였다.


혼자 사는 어린 여자는 범죄의 대상, 사기의 대상, 성적인 대상에서 1순위 타겟으로 적합했다. 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옆집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를 들키지 않게끔 유령처럼 숨어 살았다.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면 안 됐다. 외로움이라는 감정도 느껴서는 안 됐다. 그것들은 나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서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이었다. 항상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안전을 위해 주변을 경계하고 살았다.


세상에서 가장 팔자 사나운 여자가 얼굴은 반반한데 외로움을 많이 타는 여자라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난 뒤, 아무리 힘들어도 타인에게 의지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자 부단히 홀로 서려고 노력했다. 혼자 여행을 가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마시고, 혼자 웃고, 혼자 우는 게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나는 잡지사 에디터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잡지사에 조기 취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할 수 있을 정도로 글에 소질이 있었지만, 10년 전 잡지사는 열정페이라는 이상한 관례가 있었는데 더 좋은 회사일 수록 더 낮은 페이를 불렀다.


국내에서 탑티어 패션 매거진이라는 곳에서 어시스턴트 페이를 40만 원을 불렀다.

"우리 같이 멋지고 유명한 잡지사에 니 따위가 소속된 것만 해도 영광으로 생각하렴! 인심 써서 차비 정도는 챙겨줄게" 심보였다.


모든 생활비를 자급자족으로 충당해야 하는 신세인데, 한 달 월급이 40만 원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집세, 핸드폰비, 식비, 교통비.. 숨만 쉬어도 나갈 돈이 천진데 마감 기간에는 야근까지 시켜서 투잡조차 불가능했다.


"대체 저딴 돈을 받고 누가 일하는 거지..?"

그곳에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해외에서 패션 공부를 하고 들어와 부모님께 용돈을 받으며 아카데미를 수료한다는 개념으로 근무했다. 월 40만 원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명품을 두르고 비싼 점심을 사 먹는 걸 보니 애초부터 생계형 노동자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인 걸 깨달은 나는 꿈을 접고 퇴사했다.

그리고 1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글과 담을 쌓고 사무직으로 생계를 연명했다.


슬프게도 하나밖에 없던 꿈마저 나에게는 사치였다.




집에서 나와 살아도 종종 본가에 찾아갔다.

그곳은 매일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이 있었고, 귀여운 강아지가 있었고, 시끌벅적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이물질 같았던 내가 사라지니 더 평화롭고 온전한 가정이 된 것 같았다.


그곳은 온종일 강아지를 끌어안고 드러누울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었지만, 더 이상 들어와서 살 수 없는 공간이라는 괴리감은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그저 가끔 찾아와야 하는 손님 같은 자식인 것이다.


가족모임에서 술에 취하면 종종 울곤 했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수록 그들이 더 원망스럽고 외로웠으니까.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어긋난 채로 흘러간 관계는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했다.


엄마는 감사하면서도 원망스러운 사람이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자식이 아무리 속을 썩여도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출생의 비밀을 지키고, 부모의 의무를 다했으니 누구보다 이타적인 사람이었지만,

배 아파 낳은 친자식이었으면 법적인 부양기간이 끝났다고 영원히 내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원망스러워졌다.


감사함과 원망스러움이라는 양가감정이 섞여서 이건 도대체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처음 먹어보는 이상한 음식을 삼킨 기분이랄까? 엄마는 하나의 감정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혼자보다 함께하는 게 더 외로웠던 미운 오리 새끼는 가족이라는 무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2016년, 엄마에게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그동안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

7년 전, 엄마가 마지막으로 내게 했던 말이었다.


평생 동안 처음 들어보는 엄마의 사과.

엄마도 영원한 이별인 걸 받아들이고 어렵게 건넨 인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태어나서 8개월 만에 첫 번째 엄마와 이별했고

태어나서 29년 만에 두 번째 엄마와 이별했다.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내 이름 석 자만 덩그러니 찍혀 나오는걸 보니, 아무도 없는 광활한 우주에 나 혼자 우주복을 입고 떠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우주처럼 정적만이 흐르는 집에서 살았다.


우울증에 안 걸리는 게 더 이상한 인생인데

생각보다 나는 악착같은 인간이었는지 오히려 외로움, 고독함,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가차 없이 지워냈다. 안 그래도 먹고살기 바쁜데 그런 쓸데없는 감정을 키웠다가는 인생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연인과 이별해서 마음이 고통스러우면 바이러스에 걸렸다고 생각했고, 빠른 회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소모적인 행동으로 시간을 보내기엔 잃을게 너무 많았다.

나는 한 가구의 가장으로서 멘탈을 단단히 잡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부모를 원망하는 대신,

손서율 1세로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라는 존재를 싹 다 지우고 내가 태초의 조상이 되겠다고 생각한 거다.


조상이 기반을 잘 잡아놔야 후세도 덕을 보듯이, 이제 내가 태초의 조상이 되었으니 새로운 가문을 건설한다는 마음으로 최대한 열심히 살아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생각을 가지니 포기했던 꿈도 더 이상 사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인생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끊임없이 달릴 수 있는 원동력도 생겼다.


오로지 내가 가진 역량만큼 건설되는 가문이니 더 이상 누구의 탓도 할 수 없고, 기대할 수 있는 대상은 나 자신뿐이니까 삶에 애정이 샘솟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시나리오도 열심히 쓰는 것 같아요.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인생이 참 드라마 같죠?"


사무실 앞에 도착할 때쯤,

인생의 전말을 모두 털어놓은 내가 말했다.


그러자 묵묵히 듣고 있던 대표님이 대답했다.

"제정신으로 버텨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네요.. 그동안 혼자서 정말 많이 외로우셨겠어요.. 저 같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아니요? 생각보다 외롭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외로움도 사랑의 부재를 겪어야 드는 감정이거든요. 너무 혼자가 익숙해져 버리면 외로움을 잘 느끼지 못해요 그게 더 슬픈 일이지만.."


대표님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꺼내어 본 아픔의 앨범들을 고이 닫아 도로 서랍 속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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