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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워킹맘의 서툰 밥상

정성이 가득한 집밥 이야기

by 손서율


"우리 딸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 너무 반가워"


금요일 저녁 친한 동생네 집에 초대를 받아서 방문했더니 어머니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반겨주셨다.


어른들을 대하는 건 거의 회사에서 배워왔기 때문에 집안의 어른을 뵙는 일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서 어색하면 어쩌지 걱정이 됐지만 어머니를 직접 뵙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동생네 집에 방문하기 3일 전 어머니께서 막걸리를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인터넷으로 프리미엄 막걸리를 주문해 두었는데 배송 지연으로 받아 보지 못해서 오프라인으로 구할 수 있는 매장을 찾아내 하루 전날에 급하게 다녀왔다. 아침부터 막걸리 세병을 들고 출근하는 내 모습이 웃겨서 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어머님께 맛있는 막걸리를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나의 작은 성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 비가 종일 내렸는데도 어머니는 회사에서 일구는 텃밭에 나가셔서 직접 키운 유기농 야채를 한 바구니 가득 뽑아오셨다. 야근 후 마트에 가셔서 장까지 한가득 봐오시곤 도착하시자마자 부추전을 만들어 주신다고 앞치마를 메고 계셨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시켜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스러웠다.


워킹맘이라 평소에 요리를 거의 안 하시는 분이니 어머니 요리 솜씨는 기대하지 말라고 동생에게 단단히 사전 안내(?)를 듣고 왔지만 어머니가 해주신 부추전은 객관적으로도 정말 맛있었다.


비 내리는 금요일 밤 애호박과 청양고추 송송 썰어 바삭하게 부쳐낸 부추전에 톡 쏘는 탄산이 끝내주는 프리미엄 막걸리를 곁들이고 사랑스러운 두 모녀와 함께하는 소박하지만 정성 가득한 저녁 술상이 그 어떤 자리보다 힐링으로 다가왔다.


IMG_6424.jpg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어머니




오늘 저녁 술상의 주된 안건은 동생이 두 달 전에 취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녀의 좌충우돌 사회생활 이야기였다.


그녀는 맞지 않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얀마와 발리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며 좋아하던 서핑을 마음껏 즐기고 왔다. 귀국하고 나서 재취업에 다시 도전했지만 생각보다 기간이 길어져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멘탈이 무너지고 무기력하던 시기에 나에게 전화를 자주 했었다.


"언니, 요즘은 취업 사이트를 들여다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숨이 막혀 현실 도피하고 싶어"


"나도 모르게 실업급여를 받는 거에 자꾸 안주하게 돼서 걱정돼"


"자소서 어떤 게 문제인지 좀 봐줄 수 있어?"


보통은 이런 부탁이 번거롭게 다가오는데 그녀는 내가 이야기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일상생활에 바로 적용한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예뻐서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기업에 너의 이력서를 보내는 행위가 숨 막히게 느껴진다면 나를 소개하는 편지를 누군가에게 보낸다고 가볍게 생각하고 무조건 하루에 편지 세 통씩 보내봐 봐 당연한 하루 일과처럼"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논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라에서 주는 월급이라고 생각해 매일 이력서를 보내는 게 너에게 배당된 일이고 너는 지금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거야"


"자소서 내용이 너무 추상적이야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수치화시키는 게 더 승산이 있어"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실업급여가 월급이라고 생각하고 매일 커피숍으로 출근해서 정성스럽게 수정한 이력서를 매일 세 통씩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본인보다 스펙이 좋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합격했다.


그녀 또한 나에게 정말 큰 도움을 줬다. 내가 이직하고 난 후 들어왔던 조건들과 상이한 근로계약서로 멘탈이 무너져 있었을 때 그녀가 큰 힘이 되었다.


"언니가 해준 말들 덕분에 내가 취업할 수 있었어 이렇게 현명한 사람인데 분명히 좋은 결과로 다시 이뤄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언니를 믿어"


그녀의 한마디는 누구보다 나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이로운 상호작용을 해왔다. 이렇게 나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받는 그녀도 어머니와는 대화가 되질 않는다고 자주 하소연 해왔다. 하지만 어머니를 직접 뵈니 그렇게 말이 잘 통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상담 센터에서 오랜 기간 동안 근속해 오셨는데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사회에서 뵈었다면 곁에서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명하신 분이셨다.


"나는 청소년들과 상담을 할 때 아이에게 어떤 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이론대로 상담을 해왔는데 이상하게 딸에게는 그게 잘 안돼 자꾸 잔소리처럼 하게 되더라고"


"엄마는 서론이 너무 길어서 그래 언니는 요점만 딱딱 알려주는데 말이야"


"우리 딸이 무슨 일만 있으면 언니한테 연락해서 이것저것 도움을 많이 받더라고 매사에 야무지지 못해서 엄마가 옆에서 이야기해 주려 해도 세대 차이가 많이 나니 의사소통하는 게 쉽지 않았는데 중간에서 대신 이야기를 해줘서 엄마가 너무 고마웠어 그래서 꼭 만나보고 싶었어"


동생을 향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이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표현에 있어서 모녀 사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나 또한 과거에 엄마와 끝없는 의견 대립이 있었으니까


의도치 않게 내가 두 모녀 사이의 의견 대립을 완화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해왔는데 5년 전에 나에게도 이런 존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엄마와 나는 조금이라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회생활은 누구보다 잘 해내면서 가족이라는 관계는 아직은 너무 어렵게 다가온다.




저녁을 먹고 동생이 고맙게도 자신의 방을 내어줬다. 침대에 온수 매트를 미리 틀어 놓아서 따뜻하고 포근했다. 마치 5년 전 본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등산을 다녀오신 어머니께서 아침 준비를 하고 계셨다. 텃밭에서 직접 뜯어오신 유기농 야채들과 구수한 된장찌개 며칠 전부터 미리 준비해 놓으신 갖은 나물들 노릇노릇하게 구워낸 삼겹살까지..


IMG_6429.jpg 어머니가 서툰 솜씨로 정성을 다해 만들어주신 맛있는 밥상은 감동이 두배로 다가온다.


"우리 엄마 요리 안 하시는데 언니가 와서 하시는 거야 자주 놀러 와 이렇게 나도 같이 얻어먹는 거지"


애인이 해준 요리 말고 어른이 해주신 나를 위한 집 밥을 먹어본 게 5년이나 됐다. 도와드리려고 해도 손님이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는데 자급자족이 너무나 익숙한 나에게는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는 건 정말 어색하고 어려운 일이다.


나를 위해서 차려주신 진수성찬을 받아보니 감격스러웠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이겠지만 나에게는 엄청난 이벤트니까


"정말 행복했어요 다음에 또 올게요"

"나도 정말 행복했어 자주 놀러 와"




사실은 자주 놀러 가지 못할 것 같다. 누군가가 오로지 나를 위한 수고로운 밥상을 준비하는 게 정말 감격스럽고 감사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폐 끼치는 것 같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든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참 동안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밥상이 생각났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서로를 위해서 차려낸 수고로운 밥상에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 나만의 가족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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