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2006년 고3 때였다.
매일 똑같은 루트로 돌아가는 지루한 학교생활에서 가장 큰 이벤트는 매월 초에 이루어지는 짝꿍 제비뽑기였다. 제비뽑기의 룰은 여학생 이름이 적힌 종이가 담긴 박스에 남학생들이 손을 넣어 한 장씩 뽑으면 그날부로 한 달 동안 짝꿍이 되는 랜덤 게임(?)이었다.
"아... 씨발!!! 이왕표잖아 한 달 동안 전쟁이다." 첫 번째 타자인 K가 뽑자마자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절규했다. 레슬링 선수 이왕표가 별명이었던 여학생 J가 "뒤질래?"라고 외치면서 제비뽑기는 시작되었다.
한 달간의 삶의 질이 달린 일이라 긴장감은 한층 더 팽팽해졌다. 한 커플씩 탄생할 때마다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아싸!!!!!" or "아 씨발...." 탄성과 탄식으로 갈리는 월초를 매달 맞이했다.
드디어 그의 차례가 왔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내 이름이 나와라... 제발" 종이를 펼쳐본 그는 "어..?" 짧은 외마디와 함께 나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한 달간 짝꿍이 됐다.
그와는 진즉에 친한 사이였는데 갑작스러운 호감이 생긴지는 얼마 안 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반반한 얼굴에 모두가 똑같이 입는 교복조차도 혼자 핏이 남달랐다. (그때 용어로 간지가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묘하게 리폼을 하지 않았을까 의문이 든다. 페이스북에 15년 전 우리 반 단체 사진을 찾아보았더니 촌스러웠던 친구들 사이에서 '그' 혼자서만 2020년도 사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세련됐다.
그는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스타일리시하고 게다가 운동까지 잘했다. 체육시간에 발야구 시합을 하면 그가 찬 공이 가장 멀리 나갔다. 햇빛에 눈이 부셔 인상을 찡그린 채 루베이스에 한쪽 발을 올려두고 삐딱하게 서있는 모습마저도 cool했다.
그는 예술적인 감각도 타고났다. 쉬는 시간이 되면 종이에 알 수 없는 패턴들을 그리곤 했다. 훗날 자신만의 의류 브랜드를 만들 건데 그때 쓰일 로고라면서 보여주곤 했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독보적인 디자인이었다.
그는 당시 래퍼로 활동했는데 주말에 가끔 공연을 나갔다. 나는 의리로 포장한 사심을 숨긴 채 공연장에 가서 그의 이름을 외치며 응원했다. 그는 한껏 웃으며 마이크를 흔들어 화답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이름을 외치면 허공에 산산이 흩어질 뿐이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2015년 9월, 28살의 꽃다운 나이에 그는 자발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기가 막힌 건 그가 세상을 떠나고 4개월이나 지난 2016년 1월에 나는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졸업하고도 따로 만났던 친한 친구였지만 둘만 연락해서 중간에 소식을 전해줄 매개체가 없었다. 그의 죽음은 정말 오랜만에 연락이 온 고등학교 동창의 결혼식에 참석하였다가 듣게 되었다.
"나는 친한 친구가 세상에서 사라진 지 4개월 내내 몰랐던 것이다."
심지어 예식장 뷔페에서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있는 도중에 그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헐.. 너네 친하지 않았어? 소식을 못 들었구나.. 하긴 워낙 조용히 장례식이 치러져서 나도 한참 뒤에 알았어.. 많이 놀랐지?"
누군가 해머로 내 뒤통수를 있는 힘껏 내리친 기분이었다. 눈물이 나오거나 슬프지도 않았다. 그의 죽음 자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꾸 귀에서 웅웅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뒤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난다.
그와 마지막으로 연락한 건 2014년 3월 16일 페이스북 메신저였다.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2016년 1월까지 1년이 한참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열정적인 연애를 하느라 그를 한 번도 먼저 찾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버렸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집에 가서 혼자 있으면 실감이 날까 봐 예식장을 나와 지인을 만나서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 귀갓길에 술이 부족해서 편의점에 들려 더 사 왔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와의 마지막 페이스북 메시지를 켜서 읽어 보았는데 'ㅋㅋㅋ'이 남발하는 우리의 실없는 대화 속에는 그가 세상을 떠날 거라는 암시가 군데군데 녹아있었다. 내가 고개를 한번 갸우뚱하고 넘겨버렸던 중요한 암시들이..
"엄마가 페이스북에 예쁜 얼굴 사진 올리는 사람 누구냐고 물어보셔서 너라고 했어"
"응? 너희 어머니가 어떻게 내 페이스북을 보셔?"
"우리 엄마 너랑 페이스북 친구잖아 몰랐어? 내가 엄마 아이디 만들어서 친구 신청했지 엄마 페이스북 잘 못 다루실 때"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머니를 페이스북에 가입시키고 본인의 친구들과 어머니를 페이스북 친구로 이어주었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던 그의 행동이 외동이었던 그가 세상을 떠나면 어머니가 외로우실까 봐 걱정이 되어서 그랬던 거였다.
"나중에 남친 보여줘 난 너의 결혼식에 가지 않을 것이니"
"그게 무슨 소리야? 결혼식에 안 온다니.. 내 결혼식에 왜 안 와!!"
"안됨ㅋㅋ 아무튼 뭐하나 물어보자~ 내년에 다시 수험생이 돼볼까 생각하는데.. 가톨릭대학교에 가려고! 어떻게 생각해? 삼십 대의 내가 사제복을 입는 거에 대해서"
"글쎄~난 널 아니까 그냥 너다워 별나ㅋㅋ"
이 이후에는 실없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이제 보니 내 결혼식에 오지 않겠다는 그의 말속에는 분명 그 당시에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죽음을 그리던 중에 갑자기 신부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하나님을 만나려면 신부가 되던가 아니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직접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던 걸까?
그 당시에 그는 우울증과의 끝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우울증보다는 마치 암 투병을 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우울하다, 죽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내가 걱정돼서 근황을 물어볼 때마다 병원도 열심히 다니고 치료에 힘쓰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누구보다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그였다.
나는 바보같이 그의 말을 믿고 안심해버렸다.
우리의 마지막 이야기를 다시 보니 그제서야 실감이 나면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그가 너무 너무 너무 보고 싶었다.
나는 그 후로 며칠 내내 "죽음", "사후세계", "자살하면 가는 곳" 등을 검색하며 미친 듯이 서칭했다. 대체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했다. 그는 아무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증발해버리는 존재이기엔 너무나 큰 사람이었다.
"자살하면 가는 곳"을 유튜브에 검색하면 여러 무속인들이 나와서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원래 사람은 정해져 있는 명줄을 다 채워야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데 그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명부 자체에서 이탈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영원히 자살했던 장소에 머무르며 마지막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잡귀가 된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세상에서 없어져 버린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걱정이 돼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만약에 무속인들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는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특권을 주어야 한다.
그는 나에게 항상 꿈을 잃지 말라고 이야기해왔다. 내가 열정 페이에 항복하고 잡지사를 퇴사해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살 때도 그는 나의 재능이 너무 아깝다며 다른 일을 하고 살아도 글은 절대 놓지 말라고 공모전 링크를 보냈었다. 2011년도 올레 e북 작가 공모전이었다.
그의 간절한 마음을 생각해서 다시 펜을 쥐고 딱 세 줄 쓰다가 노트를 덮어버렸다. 돈 때문에 못 해 먹겠어서 작가라는 직업에 정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당장 통장에 꽂히는 돈에 좌지우지되는 나보다 더 멀리 볼 줄 알았다. 그의 눈에는 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대학교 교양과목에서 흑백 필름 카메라 사진 찍기 과제가 있었는데 필름 카메라까지 잘 다루던 그에게 (대체 못하는 게 뭔지..) 부탁해 함께 거리를 걸으며 사진 찍는 법을 배웠다. 인생의 시야든 카메라 렌즈로 보는 시야든 빠른 89였던 그는 엄연히 누나인 나보다 모든 시야에서 훨씬 앞서 있었다.
또한 그는 의류 브랜드 런칭을 준비하며 고등학교 쉬는 시간에 틈틈이 그려왔던 본인의 브랜드 로고를 세상에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엎드려 자고 있던 10분 남짓한 쉬는 시간마저 그는 허투루 쓰지 않았다.
"뭐해?"
"등산 가려고! 다녀올게~ 잘 지내고 있어"
무슨 등산을 며칠씩이나 다녀오나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네팔에 가서 에베레스트를 등산하고 돌아왔던 그였다. 에베레스트를 뒷동산 가듯이 이야기하는 그는 대단한 일을 해내도 항상 그렇게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세상에 다시 나타나는 상상을 한다. 그와 함께 했던 추억 중에 단 하루만 돌아갈 수 있다면 2006년 우리가 고3이었던 여름의 어느 날 석식 메뉴가 형편없다는 핑계로 함께 야자를 째고 그의 집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삼겹살을 구워 먹던 날 그가 가장 잘 구워진 삼겹살을 내 공깃밥 위에 무심히 올려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 공깃밥에 삼겹살을 올리는 그의 손을 낚아채서 꼭 잡고 싶다.
그리고 그의 눈을 보며 스타카토로 끊어서 말할 거다.
"너무,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