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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소공녀, 밤에는 소송녀

명품관 생존기 (수필-1편)

by 손서율


*수필에서 나오는 브랜드 <아델리나 르끌레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브랜드입니다. 적나라한 수필에서 실제 브랜드 이름을 기입할 수 없어 가명의 네이밍을 사용하였습니다.


2024년 3월, 백화점으로 들어서자 코스메틱 브랜드들이 영역 표시를 하듯 뿜어내는 향수 냄새들로 옅은 두통이 밀려왔다.


"아델리나 르끌레르.. 아델리나 르끌레르.."

난생처음 들어보는 브랜드라 혹여나 까먹을까 봐 주문을 외듯 중얼대며 2층 명품관으로 올라오니 가장 눈에 띄는 명당자리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매장이 눈에 띄었다.


"저기요..?"

안으로 들어서니 아무도 없는 텅 빈 매장. 프론트 행거에 걸린 우아한 오간자 드레스,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비쌀 것 같은 고풍스러운 원목 가구들, 선반 위에 놓인 독특한 디자인의 백들이 예술작품 같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약속했던 면접 시간이 지나있어 당황하는데.. 그때 벽 뒤에 숨겨진 공간에서 단발머리에 스모키 메이크업을 한 중년의 여자 점장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아까 전화로 면접 보기로 한.."

"인상이 참 좋네요 몇 살이라고 했죠?"

"서른일곱 살이에요"

"너무 좋네~ 어리지도 않고. 백화점 경력은 있어요?"

"아니요. 처음이에요"

"그럼 오늘부터 일해볼래요?"

"오늘부터요? 너무 갑작스러운데.."

"어차피 일할 거면 빨리해 보는 게 좋죠! 따라 들어오세요"


점장을 따라 숨겨진 공간으로 들어오니 옷으로 가득 찬 좁은 창고가 나왔다.


"이걸로 갈아입고 나오세요"

얼떨결에 손에 쥐어진 블랙 드레스. 점장이 나가자마자 드레스 택을 뒤집어 보는데 COS라고 적혀있다.


'뭐야, 여기 옷이 아니었어? 아무리 비싸도 그렇지 직원 유니폼을 다른 브랜드로 입히는 거 웃기네'


얼마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점장이 환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날씬해서 태가 나오네 다행이다! 전에 일했던 직원은 퉁퉁해서 정말 곤란했거든"


점장의 감탄사를 들으며 거울을 보는데 발목까지 내려오는 블랙 롱드레스와 창백한 얼굴이 영락없는 소공녀였다.




"서른일곱 살 시나리오 작가. 명품관 아르바이트생이 되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다 말고 돌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현재 재직 중인 회사와의 <부당 정직 구제신청> 소송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당시 회사 대표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중소기업 창업 지원금을 노리고 컨탠츠 사업을 하는 것처럼 위장 공고를 올려 시나리오 작가를 모집했고. 시나리오 작가로서는 두 번째 직장이었던 나는 워낙 경험이 없으니 이런 구린 속셈을 모른 채 대표와 계약서를 썼다.


취업 후, 내가 제출해 온 시나리오를 단 한 번도 컨펌하지 않고 방치하던 대표는 갑자기 컨텐츠를 제작하는 법인을 하나 더 세울 건데 대표이사를 작가님 명의로 써야겠으니 어서 명의를 내놓으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나는 얼토당토않은 대표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며칠 뒤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와 함께 임금체불까지 감행했고, 근거 없는 해고를 하려면 해고예고수당 한 달 치를 지급하라 했더니 돌연 해고를 취소하고 무급 정직 4개월로 입장을 바꿨다.


나에겐 한순간에 덮친 교통사고처럼 기습적인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해고통보, 임금체불, 근무태만 누명, 무급여 정직 4개월이라는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졌다.


애초부터 시나리오 따윈 필요 없었다. 본래 목적이었던 정부 지원금을 갈취하기 위해서는 청년에 속하는 나이에 출간 작가였던 내 명의로 법인을 세우는 게 지원금을 받기 유리해서 벌인 대표의 사기극이었다.


이제부터는 주경야독을 하듯, 낮에는 명품관의 '소공녀', 밤에는 재판 준비하는 '소송녀'가 되어야 한다.

대표가 내린 무급 정직 기간 4개월 동안 퇴사하지 않고 버텨야만 <부당 정직 구제신청 소송>을 이어갈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재직자의 신분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다른 회사에 취업할 수도 없다. 이중 취업이 되어버려 재판에 불리하게 적용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복잡한 이유로 외국인 불법체류자처럼 일용직이나 아르바이트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의 속 사정을 알리 없는 점장은 온종일 명품관 카운셀러의 비전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열심히 해봐~ 점장 달면 억대 연봉도 받고 나이 제한 없이 오래 할 수 있어서 여자가 하기에는 정말 좋은 직업이야"

"네 열심히 해볼게요"

"그나저나 아델리나 르끌레르라는 브랜드를 알고 있었니? 아는 사람들만 아는 브랜드라"

"아니요? 처음엔 속옷 브랜드인 줄 알았어요"

"속옷.. 브랜드라니?"

"아.. 그 뭐였더라..? 모델들이 날개 달고 런웨이 걷는"

"설마 너.. 빅토리아 시크릿 이야기하는 거니?"

"맞다 빅토리아 시크릿! 그런 브랜드인 줄 알았어요"

"세상에.. 그런 데서 일하려 했단 말이야..?"


고작 빅토리아 시크릿에 기겁하는 점장에게. 그저께까지만 해도 담배 연기 자욱한 노포 호프집에서 서빙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벌레 보듯 쳐다볼 것 같아 말을 삼켰다.


나는 노포든 명품관이든 소송만 이어갈 수 있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만큼 끝까지 싸워야겠다는 목적의식이 너무나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이 힘겨운 싸움에 에너지를 갈아 넣는 내 자신을 수없이 말려보았지만 나의 자아는 너무나 단호했다.

'짓밟힌 꿈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이 상처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어. 평생 작가하려면 지금의 상처부터 치유하고 나서 다시 펜을 잡자. 그게 올바른 순서야.'


그렇게 소공녀로 위장한 소송녀는 명품관 첫 업무부터 난관에 부딪히게 됐다.

스팀질을 하기 위해 옷들을 가져와서 택을 확인해 보는데 원피스가 2000만 원, 자켓이 1000만 원, 스커트가 700만 원, 바지 한 벌이 500만 원, 끈나시 한 장이 200만 원이었다.


모든 옷들이 아무런 로고가 없어, 내 옷장에 있는 옷들과 크게 괴리감이 없었는데 가격을 보고는 식겁했다. 설상가상으로 2000만 원짜리 원피스는 수제로 한 땀 한 땀 꿰어낸 크로셰 소재라 옷깃만 스쳐도 올이 나갈 것처럼 생겼다.


"점장님.. 가격이 너무 후덜덜해서 못 만지겠어요"

"여긴 다 후덜덜한데 어째? 만져야 일하지"

"혹여나 올이 나가거나 옷감이 상하면 제가 보상해야 하는 거예요?"

"물어내라고까지는 안 할 건데 그래도 조심히 다뤄야 해!"


차라리 가방처럼 선반에 모셔두었다가 잠깐 보여주는 거면 부담이 적을 텐데. 의류는 끊임없이 손을 탈 수밖에 없었다.

스팀질을 하고 옷걸이에 걸고 손님한테 입히고 수선실에 가져가는 과정에서 미세한 얼룩이 묻거나, 올이라도 나가는 순간 대형사고라 긴장되었다.


대체 이런 옷들은 누가 입는 걸까? 돈은 차고 넘치는데 모든 명품들이 지겨워져서 아무도 모르는 브랜드를 입고 싶어진 걸까?

더 로우, 로로피아나같이 로고 리스 브랜드도 곧잘 아는 나에게마저 생소한 브랜드의 원피스를 2000만 원이나 주고 살 일이냔 말이다.


항상 손님들로 북적이는 건너편 셀린느 매장과 다르게 이곳은 대부분 한가했고. 가끔 찾는 손님들 마저 점장과 친목이 깊은 사람들뿐이었다. 그 말인즉슨 연말 성과급 버프로 큰맘 먹고 명품관을 찾는 나 같은 잔잔 바리 월급쟁이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하루 일해보니 이것보다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앉아서만 일해 온 글쟁이를 종일 세워 놓으니 다리가 살려달라고 아우성이었던 것이다. 분명 반나절 넘게 산책해도 끄떡없던 다리였는데. 한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건 체중이 분산되지 않아서인지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다리가 너무 아파.. 다들 어떻게 일하는 거지?'

주변 매장들을 둘러보니. 에르메스, 보테가 베네타, 셀린느, 발렌시아가, 알렉산더 맥퀸, 미우미우, 메종 마르지엘라.. 모든 매장이 고객이 앉을 수 있는 소파만 마련되어 있을 뿐, 직원들은 근무시간 내내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점장님, 다리가 너무 아파요"

"당연한 거야. 나야 20년 넘게 일했으니 단련되었다 해도. 평생 앉아서 일했던 사람들은 몇 날 며칠을 앓더라고"

"이렇게 종일 서서 일하면 하지정맥 안 와요?"

"나는 아직 안 왔는데 수술하는 직원들은 많이 봤어"

"세상에.. 그건 산재 처리되는 거예요?"

"그런 게 어딨니?"

점장은 얘가 대체 무슨 소릴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다들 억대 연봉을 받아서 다리 아픈 것도 잊은 건가?'

나의 의문과 달리 그들은 억대 연봉으로 버티는 게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버틸만했기 때문이었다.

백화점 규정상 매장에 한 명 이상은 무조건 서 있어야 해서 직원끼리 로테이션으로 쉬러 가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는데. 오직 아델리나 르끌레르만 직원이 나밖에 없었다.


본사에서 나오는 운영비를 쓰기 아까워 직원 한 명으로만 매장을 풀로 돌리는 악덕 점장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급하게 사람을 구했던 것도. 이전 직원들의 잦은 퇴사도 모두 이유가 있었다.




"서율아 20분 쉬고 와.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가다 보면 스텝 온리라고 적혀있는 문 보일 거야"


점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매장을 빠져나왔다.

옆 매장 직원 세 명이 로테이션을 돌 동안 나는 한 번도 쉬지 못했으니 이 빈약한 다리로 3인분을 버틴 것이다. 제한 시간 20분이라니.. 1분이라도 더 앉혀야 한다.


은은한 무드 등과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이 반짝거리는 명품관을 가로질러 걷다 보니, 구석에 숨겨져 있는 <STAFF ONLY>라고 적힌 문을 발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전혀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빛바랜 형광등, 값싼 바닥재,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박스들 틈에 파티션으로 가려놓은 낡은 의자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는데 이곳이 직원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의자에 앉자마자 단화를 벗어던지고 핸드폰을 켜서 아르바이트 공고부터 확인했다.

<월, 수, 금 오후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구합니다.>

<평일 오전 파트타임 구합니다.>

<주말 토, 일 아르바이트 구합니다.>


아무리 뒤져봐도 이곳처럼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 11시간이나 뛸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없다. 매일 풀타임으로 일해야만 기존에 받았던 월급의 언저리라도 받을 수 있을 텐데..


취업 형태가 아닌, 단순 아르바이트들은 파트타임으로 잘게 쪼개 놓아 생활비로는 택도 없다. 결국 명품관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송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취업사기와 임금체불을 마다 않는 싸이코 대표랑 싸우기 위해서, 노동 착취를 일삼는 마녀 점장 밑에서 일해야 하다니.. 사면초가가 이럴 때 만들어진 사자성어였구나.




그때, 백화점 스피커에서 나른하면서도 경쾌한 샹송 <에디트 피아프 - 라비앙 로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서글퍼졌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신간 도서를 출간하고, 기사 인터뷰도 하고, 독자들을 만나 북토크도 하고, 그토록 원했던 시나리오 전업 작가 일도 계속 이어가던 라비앙 로즈 (장밋빛 인생) 였으니까.


왜 내 인생은 갑자기 산으로 가고 있는 걸까?

눈앞이 캄캄해 장밋빛은커녕, 아무 빛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오늘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할 수밖에..


라비앙 로즈의 클라이맥스를 듣던 소공녀는 검은 드레스 자락을 펼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동의 스탠딩 오베이션이 아니라. 앉을 수 있는 제한 시간 20분이 다 되었기 때문이었다.


좀 쉬었더니 나아진 줄 알았는데 일어서자마자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이 모든 건 내가 감당하겠다고 자초한 일이니 매장으로 돌아가는 내내 고집불통인 나 자신을 향해 한껏 비아냥거렸다.


"그래 손서율, 니까짓 게 똥고집 부려봤자지. 신체의 자유도 박탈당하면서 얼마나 버티겠어?"


그러나 이때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저질 체력에 불만 가득한 소공녀가 장장 90일 동안이나 명품관에서 버티며 소송을 이어갈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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