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관 생존기 (수필-2편)
수십 년간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나오는 장면이 있다. 검소한 옷차림으로 명품관을 찾은 부호가 자신을 무시하던 직원을 참교육하는 장면이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모두 결제해 주세요"
정체를 드러낸 부호의 한 마디에 직원은 안절부절못하며 비굴해지는 사이다 클리셰가 실제로 존재할까?
내가 90일가량 명품관에서 일하며 깨달은 것들은 이렇다.
1. 손님의 70%는 이미 단골들이다. 오는 사람만 주구장창 온다.
2. 손님의 25%는 초면이라도 이미 명품을 여기저기 두르고 있다. 우리 매장만 안 왔던 거지 평소에도 명품관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이다.
3. 손님의 단 5%가 드라마에 나오는 검소한 옷차림을 한 부류인데. 마치 박물관에 온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만 하고 나간다.
*물론 검소한 옷차림을 한 부호들도 많다. 그들은 부동산, 땅, 주식쇼핑을 하느라 명품에 관심이 없고. 애초부터 명품관에 오질 않기 때문에 확률에서 제외되었다.
이런 확률을 모두 무시하고 실제로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도 사이다 참교육은 성립될 수 없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모두 결제해 주세요!"라고 하면 무례했던 점장은 민망해하며 어쩔 줄 몰라할까? 단언컨대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할 거다. 그날 일찌감치 영업을 접고 창고에서 샴페인을 터트릴게 뻔하다.
명품관 카운셀러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건 자존심이다. 진상을 부리든, 참교육을 시전 하든 매출 올려주는 것만큼 최고의 고객은 없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듯이 어떻게든 팔기만 하면 장땡인 것이다.
점장은 종종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 일 하려면 손님 앞에서 무릎 꿇는 건 아무렇지 않아야 해"
"무릎 꿇은 적 있었어요?"
"많지~ 돈 생각하면 무릎 꿇는 것쯤이야 쉬워. 자존심 따위가 밥 먹여주니?"
이런 사람한테 돈쭐로 참교육을 한다니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그럼 백화점에서 볼 수 있는 실제 VVIP들은 어떤 모습일까?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VVIP를 처음 마주한 기억이 생생하다. 장신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구형 미인이었는데, 뭐가 그리 급한지 매장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어머 미연 씨 오셨어요?"
"바지 좀 보여주시겠어요? 곧 출국해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는데 빨리 좀 부탁해요"
점장은 서둘러 바지를 두 세벌 들고 나왔고. 낚아채듯 탈의실로 가지고 들어가더니 10분도 안 되어 한 벌을 골라 입고 결제하고 나갔다.
나는 손님이 바로 입을 수 있도록 택을 잘라줬는데. 택에 적힌 가격이 무려 600만 원이어서 깜짝 놀랐다. 600만 원짜리 바지를 10분 컷으로 구매하다니.. 나에게 10분 쇼핑이란 스타킹에 올이 나갔을 때 급하게 편의점에 들르는 시간인데 말이다.
이렇게 똑같은 600만 원으로 일반 고객은 오랫동안 고심해 온 예물 가방을 사는 반면, VVIP는 스타킹을 갈아 신듯 10분 컷으로 바지를 고른다.
이렇게 그들만이 사는 세상에서도 끝판왕인 VVVIP가 존재했는데. 그녀가 명품관에 등장하면 모든 매장이 들썩이곤 했다.
"옆 매장에 황수진 님 오셨네 신상 들어온 거 밖으로 빼놔!"
오후 5시가 지나도록 개시조차 하지 못해 시무룩했던 점장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황수진 씨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출몰하는데 올 때마다 여러 매장들을 순방하면서 매출을 고루 올려준다.
그녀는 항상 빈손으로 쇼핑을 다닌다. 쇼핑한 물건들은 매장 직원들이 직접 차에 실어 주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 광경을 보곤 VVVIP의 면을 세워주기 위한 특급 예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도저히 혼자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사기 때문에 꼭 필요한 컨시어지 서비스였다.
에르메스, 프라다, 보테가 베네타, 셀린느, 미우미우, 불가리, 까르띠에, 부쉐론... 모든 브랜드의 직원들이 그녀의 벤츠 넘버를 외우고 있었는데. 이쯤 되면 백화점 측에서 그녀의 차 번호를 직원 공지사항에 띄워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명품관 외에도 백화점 수선실과 발렛파킹마저 황수진 이름 석 자면 대기 순번을 모두 제끼고 프리패스가 가능했다.
백화점 시설 전체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VVVIP의 약자 그대로 Very Very Very Important Person이었다.
황수진 씨는 기껏 해봐야 내 또래로 보였다. 밝은 갈색 머리, 관리 잘 된 예쁜 얼굴, 장난기 묻어 나오는 표정, 틀에 박힌 우아한 스타일보단 여러 브랜드를 트렌디하게 믹스 매치하는 걸 좋아했다.
나는 그녀의 직업을 멋대로 추측하곤 했는데. '옷 잘 입는 노는 언니' 이미지라 동대문 도매 의류 업계를 꽉 잡고 있는 큰 손일 거라 생각했다.
나중에 듣고 깜짝 놀랐던 건 그녀의 실제 나이가 50대였다는 것이다. 30대 후반에서도 동안 소리를 들었던 나와 또래로 보인다는 게 충격적이었고. 그녀의 본업이 법무법인 대표라는 점과, 장성한 대학생 딸이 있다는 것도 모두 놀라웠다.
나의 추측이 모두 빗나간 이유는, 쉰을 넘긴 나이와 전투적인 직업에 비해 그녀는 너무나 맑고 양순했다.
자신이 골라둔 옷을 다른 손님이 가져가서 피팅해도, 직원이 미처 체크하지 못해 소매에 매달려 있던 시침핀에 찔려도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하하" 웃으며 호탕하게 넘겼다.
본인이 백화점에서 가장 VVVIP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차에 물건을 실어 주는 걸 항상 미안해하고. 직원들이 마실 커피를 사다 주며 옆집 언니처럼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더니 황수진 씨 외에도 VVIP 손님들은 하나같이 여유롭고 배려 깊었다. 일반 고객들은 입장하기조차 부담스러운 한적한 명품관이 그들에겐 동네 카페에 들르듯 오며 가며 커피를 마시고, 동네 세탁소에 들르듯 수시로 수선을 맡기러 오는 공간이라 오히려 소탈하게 행동했다.
반면 예민하게 굴고 괜한 시비를 거는 손님은 90일 동안 근무하면서 딱 한 명 보았는데. 결제할 때 보니 본인 신용카드가 아니었고 결국 환불하러 다시 왔다. 평소에 오기 어려운 공간이니 어그로를 끌어서라도 특별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VVIP의 인생에서 화가 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백화점 VMD들이 계절별로 꾸며놓은 명품관이라는 동화 속에는 마녀가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냄새, 아름다운 생화, 반짝거리는 보석과 명품백들, 고급 샴페인을 내어주며 미소 짓는 사람들뿐.. 비극이 존재하지 않는 동화 속에 사는 그녀들이 STAFF ONLY 문 너머의 척박한 백스테이지를 알 리가 없었다.
반면, 내가 사는 동화 속에는 온갖 빌런들이 타노스 군단을 이루어 나를 공격해 왔다. 회사 대표는 임금체불을 해놓고 되레 법무법인을 선임해 나를 짓밟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중이고, 사이가 좋았던 직원들은 대표의 지시에 못 이겨 나의 근무태만을 목격했다고 거짓 증언을 한다.
명품관 점장은 인건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반나절을 홀로 매장에 세워놓는 걸로 모자라, 본인 기분 내키는 대로 갑질까지 일삼고. 종일 서서 일하느라 다리가 아파 벽에 기대어 있으면 백화점 총괄 팀장이 매장으로 들어와 눈치를 준다.
하지만 악몽으로 가득한 나의 이야기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저 그들의 아름다운 동화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샴페인을 건네는 엑스트라일 뿐이었으니까.
이렇게 삶에서 가장 춥고 어두운 시기에 명품관에서 근무하면서 다행이었던 건, 그동안 잘 다져놓았던 자존감 덕분에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덫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시기, 질투는 나쁜 마음이 아닌, 생명이 품고 있는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하다못해 집에서 기르는 개도 주인이 다른 개를 쓰다듬으면 으르렁대며 질투를 한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일수록 이런 본능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남의 밥그릇을 백날 들여다봤자 내 밥그릇이 되질 않는데,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비효율적인 감정을 구태여 가슴에 품지 않는 것이다.
나는 황수진 씨의 황금 밥그릇을 들여다보며 절망할 시간에 당장 내 밥그릇을 재건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 보곤 했다.
내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계산을 마친 황수진 씨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매번 부탁드리기 미안하네요"
그러자 점장이 커다란 쇼핑백 두 개를 내게 건네며 물었다.
"왜요 수진 씨?"
"워낙 하얗고 가냘퍼가지고 들어달라고 하기가.."
"에이~ 그렇다고 늙은 내가 들 순 없잖아 하하! 서율아 차 번호 알지? 잘 실어 놔!"
쇼핑백을 받아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니 종일 한적했던 2층 명품관과 다르게 1층 코스메틱 매장에는 사람이 꽤 보였고. 지하 푸트코트에는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인파가 많아지는 백화점의 구조가 내 눈엔 부의 피라미드처럼 보였다.
지하 2층 주차장 발렛부스에 도착해서 차 번호를 이야기하니 기사님께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야기했다.
"또 황수진 님? 이리로 따라오세요. 어휴! 어마어마하게 사네요 아까부터 계속 내려와서 이게 몇 번째인지 원.."
검은색 벤츠 문을 여니 명품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매장별 쇼핑백들로 가득 차 있었고. 어느 매장에서 조공을 한 건지 샴페인과 꽃도 실려 있다.
앞뒤 좌석 모두 놓을 공간이 없어 프라다, 미우미우, 알렉산더맥퀸 쇼핑백을 바닥으로 치우고 틈새에 힘겹게 쇼핑백을 끼워 넣은 뒤 차 문을 닫는 순간. 짙게 썬팅된 차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야윈 얼굴과 굳은 표정, 눈 밑에 검게 드리운 그늘..
고된 삶에 찌든 안색에는 밀린 월급과, 끝없이 이어지는 재판 공방, 하루 11시간이 넘는 육체노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그제야 황수진 씨의 밥그릇에서 내가 가져올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곧장 백화점 1층 로비로 올라와 화장실 파우더 룸에 앉은 나는, 드레스 주머니에서 라즈베리색 립스틱을 꺼내어 입술 선을 따라 정성스레 발랐다.
그동안 립스틱을 수시로 챙겨 바르라는 점장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들었었는데. 노동착취에 지쳐버린 얼굴을 명품관의 미관을 위해 억지로 포장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차창에 비친 수척한 내 얼굴이 황수진 씨의 여유로운 미소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순간, 벤츠 안을 가득 채운 명품들을 보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파동이 일었다.
나의 존엄을 지켜내는 것은, 가짜 생기를 불어넣는 립스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한의 세월을 살아내면서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해야 할 마음 수양이었던 것이다.
“립스틱 발랐네? 진작 바르라니까! 생기 있어 보이잖아.”
매장으로 돌아오니 점장이 화색을 띠며 이야기했다.
날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닌, 매장에 놓는 오브제가 마음에 들어서 하는 말투였다.
점장의 바람대로 예쁜 오브제가 되겠다고 바른 립스틱이 아니다.
그것은 나만의 결심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삶에 찌들지 않겠다는 결심.
겨우내 앙상한 시절을 다 잊어내고, 만개한 벚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