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관 생존기 (수필-5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13:20분. 소공녀는 미칠 지경이었다.
무려 3시간 넘게 마네킹처럼 서 있었더니 다리의 감각은 마비된 지 오래였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건너편 매장은 직원들 셋이서 사이좋게 교대 근무를 서고 있는데, 이 빌어먹을 점장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나를 망부석처럼 매장에 홀로 세워두곤, 본인은 느긋하게 집에서 브런치 타임을 즐기고 있으시겠다? 짜증이 솟구쳐서 손님 전용 소파에 냅다 앉아버렸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백화점 총괄 팀장이 매장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점장님 아직 안 오셨어요?" (뭐야? 너 왜 앉아있냐?)
"곧 오실 거예요~" (다리 아파서 못 해 먹겠으니 간섭하지 말고 나가라 좀)
결국 팀장의 눈치에 못 이겨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현타가 몰려왔다. 이렇게 적성에도 안 맞는 명품관에서 일하다 보면 수시로 현타가 찾아오는데, 이미 오늘 아침 백화점 조회시간에도 씨게 한 번 왔었다.
"여러분, 고객님이 오시면 어떻게 말해야 하죠?"
"반갑습니다 고객님이요!"
"맞아요 그냥 인사만 하면 안 돼요! 진심을 담은 스마일~~ 따라 해 보세요"
"스마일~~"
10시간을 풀로 돌리는 백화점에서, 직원들 앉아 쉴 의자 하나 못 놓게 하면서 스마일 가스라이팅이라니.. 하지정맥 생기면 산재처리도 안 해주는 것들이 스마일 타령이 웬 말이냔 말이다.
심지어 오픈전이라 재빨리 청소를 끝내면 앉아서 쉴 수 있는 유일한 골든타임에 20분 내내 세워놓고 진행되는 서비스 교육은 무슨 말을 해도 '염병하네' 밖에 생각이 안 들었다.
패션에 아무런 열정도 자부심도 없는 나에겐, 고객님의 미관을 해칠까 봐 신체의 자유까지 박탈하는 명품관 업무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반대로 글쓰기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온종일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라고 강요하면 이런 기분인 걸까?
하기 싫은 일을 체력까지 쥐어짜가며 하는 건 매일이 고통이었다. 그래서 매장이 한가할 때마다 몰래 이어폰을 꽂고 부처님 말씀이나 명상을 듣곤 했다. 아르바이트가 아닌, 고된 수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멍하니 서서 흘려보내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나의 생각이 자동으로 활자로 옮겨지는 상상을 하곤 했지만, 실현될 수 없는 안타까운 망상일 뿐이었다.
이렇게 내적 갈등으로 하루도 마음이 소란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그럴수록 묵언수행을 하듯 입을 꾹 다물었다. '염병하네'를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동안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불만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 다리를 아작 내는 걸로도 모자라 굶겨 죽일 작정인 거지?"
한숨과 함께 꾹꾹 눌러두었던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올 때쯤. 저 멀리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매장으로 걸어오는 점장이 보였다.
"서율아 배고프지? 다리 아프겠다! 옷 좀 갈아입고 올게"
뻔히 알면서도 오후 두 시가 다 되어가도록 매장에 홀로 방치하는 건, 나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거다.
이윽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점장이 나오더니, 무언갈 발견한 듯 행거에 걸린 자켓으로 다가가 옷깃을 휙 들쳐보더니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지금 장난해? 오픈 한지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단추가 안 잠겨 있어? 내가 옷 상태 꼼꼼히 점검하라고 말했잖아! 한 번 말하면 못 알아듣니?"
그깟 단추 하나 풀려있다고, 끼니도 거르고 3시간 넘게 다리가 아작 나도록 서서 버텨낸 나를, 쥐 잡듯이 잡는 점장을 보니 기가 막혔다.
'단추 하나 가지고 게거품 무는 그 열정으로 출근 좀 하세요. 본인은 놀자판이면서 왜 알바를 잡습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팩폭을 겨우겨우 삼켜낸 나는, 그 자리에서 매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백화점 지하 푸드코트로 내려가 마라탕 집으로 향했다. 입맛이 뚝 떨어져 배도 안 고팠지만, 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극한의 분노를 가라앉히려면 뭐라도 입에 욱여넣어야만 할 것 같았다.
"마라탕 3단계에 고추기름은 별도로 주시겠어요?"
이윽고 용광로 같은 시뻘건 마라탕이 나왔고, 그 위에 고추기름을 모두 들이붓고는 몇 입 먹다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중얼댔다.
"시발! 거지 같아서 못 해 먹겠네"
난데없는 육두문자에 옆 테이블에 있던 남자 두 명이 놀라 쳐다보는데,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 빌어먹을 소공녀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명품관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마라탕 한 그릇을 모두 비울 동안, 얼얼한 통증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꽉 막힌 울화통이 조금씩 뚫리기 시작했고. 매장을 박차고 나온 지 30분 만에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나와의 대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
'서율아 네가 때려치운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잠시 컴다운 하고 계산기를 두드려보자.'
'알겠어.. 진정할게'
'여기 때려치우면 소송을 이어나갈 자금을 구할 방법이 있어?"
'아니, 주 6일 풀타임 아르바이트는 아무리 찾아봐도 여기뿐이야. 다른 아르바이트로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어'
'취업 금지 기간이 얼마나 남았지?'
'회사에서 내린 정직 기간 4개월 중에 이제 2개월 남았으니, 소송을 계속 이어나가려면 2개월간 이중 취업이 불가능한 상태야'
'그럼 2개월만 명품관에서 버티면 되는데 못 버티겠어?'
'2개월만? 지금 2시간도 고역인데? 지멋대로 갑질하는 점장도, 스마일 가스라이팅도 도저히 못 버티겠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이 거지 같은 백화점을 당장 때려치우고! 지긋지긋한 소송도 때려치우고! 오늘부터 새 인생 살자.'
'소송을 때려치우라고..?'
갑자기 번개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애초부터 "중도 포기"라는 옵션이 전혀 없는 상태로 시작한 소송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왜 이 소송을 그만둘 수 없는 걸까?
나는 왜 어쭙잖은 갑질과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도 명품관을 그만두지 못하고 꾸역꾸역 소송을 이어나가고 있는 걸까?
원고 쓸 시간도 모두 포기하고, 온종일 마네킹처럼 서서 다리를 혹사시키며 4개월이나 갈아 넣을 정도로, 나를 농락한 대표에 대한 복수심이 이렇게나 대단했단 말인가?
점장의 갑질은 나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같았다.
"이렇게 어이없는 갑질을 일삼는데도 소송을 해야겠어?"
"이렇게 온종일 세워놓고 노동착취를 하는데도 소송을 해야겠어?"
"괴로워 죽겠다면서 기어코 소송을 해야겠어? 그거 이겨서 뭐 할 건데? 왜 이렇게 집착하는데?"
쏟아지는 질문들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도 내 똥고집은 포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게 소름 끼쳤다.
이미 모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칼을 뽑아 든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표의 아킬레스건을 긋고야 말 거다. 모든 일상이 멈춰진 지금, 이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다.
이 소송은 복수심이라는 감정으로도, 승소하면 받을 수 있는 금전 보상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했다.
나의 집요함의 원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갑자기 기가 막힌 비유가 떠올랐다. 뜨개질로 한 땀 한 땀 "인생"이라는 스웨터를 뜨는 와중에 코바늘 하나가 잘못 꿰어졌고, 그 지점부터 뒤틀리게 떠지는 스웨터를 차마 내버려 둘 수 없어서, 하던 작업을 모두 멈추고 꼬여버린 실타래를 집요하게 풀어내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반드시 꼬인 부분을 말끔히 풀어내야만 제대로 된 스웨터를 뜰 수 있듯이, 온갖 누명을 뒤집어 씌운 부당한 징계를 끝까지 바로잡아야만, 인생의 다음 장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모두가 소송에 에너지를 쏟는 건 비효율적이라며 뜯어말리는데도, 내 삶에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수 과정이었던 것이다.
"하.. 마녀가 필요했네"
아이러니하게도 점장은 이 소송에서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었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직원을 한 명만 뽑아 일주일 내내 풀타임으로 돌리는 못 돼먹은 점장 덕분에 고정지출이 많은 생활비를 오로지 아르바이트로 감당하면서 소송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
갑질이 일상인 마녀 밑에서 일해야만, 취업사기와 임금체불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삼는 사이코패스를 제압할 수 있다.
그깟 알량한 점장의 갑질 따위로 일희일비하지 말자. 점장은 목표를 이루게 해주는 수단일 뿐이고, 명품관은 내 삶의 본거지에서 일어난 전쟁 자금을 공급해 주는 병참기지 아닌가? 지금은 본게임을 이기는 데에만 사활을 걸어야 한다.
비로소 소공녀는 매장을 가출한 지 50분 만에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패기 넘쳤던 가출을, 점심 먹으러 다녀온 걸로 노선 변경하려면, 앞으로 10분 안에 복귀해야 한다.
그렇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매장에 돌아오니, 붉게 상기된 얼굴로 서 있던 점장과 눈이 마주쳤고, 나는 말없이 고개만 까딱거리곤 창고로 쏙 들어갔다.
현실과 타협해 다시 기어들어왔지만,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었다면 사람 취급도 안 했을 점장에게 구태여 살갑게 굴고 싶지 않았고, 점장이 나를 기분 내키는 대로 함부로 대하는 만큼, 나 또한 점장을 철저히 돈줄로만 취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웃픈 건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점장에겐 아무리 고강도 노동착취를 해도 좀비처럼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 알바생은 나뿐이었고, 나에겐 소송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돈줄이 점장이었으니까.
이런 개 같지만 끈끈할 수밖에 없는 개끈 같은 인연이 또 있을까?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는 매장, 나도 점장도 입을 꾹 다물고 앞만 주시하며 서 있었다.
오늘따라 매장에는 손님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고, 그렇게 둘은 무거운 침묵의 공기를 견디며 장장 6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윽고 마감시간이 다가오자 점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퇴근 준비해"
"네"
창고로 들어와 짐을 챙기고 있는데 점장이 따라 들어오더니 이야기했다.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본인 기분 나쁘다고 아무 말도 안 하고 뚱하게 있는 게 맞다고 생각하니?"
점장의 핀잔에 나도 모르게 눈물방울이 두 뺨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니가 뭘 잘했다고 울어?"
"너무 힘들어요. 하루 종일 서있는 것도, 점장님이 뭐라 하는 것도요"
"원래 그런 거야. 여기 일은 뭐 쉬울 줄 알았어?"
"이렇게 몸이 힘든 일인 줄 몰랐죠. 하.. 쪽팔리게 서른일곱이나 먹고 울다니"
"쪽팔릴게 뭐 있어? 나이 먹었다고 울지 말라는 법 있니? 다들 울면서 일해"
"점장님도 참 독하네요. 우는 사람한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뭐라 하시는 거 보니"
"우는 건 우는 거고 할 말은 해야 할 거 아냐? 좀 뭐라 했다고 기분 나쁜 티 팍팍 내면서 온종일 입 다물고 있으면 어쩌라는 거야?"
"버티느라 그런 거예요. 입이라도 다물고 있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알겠으니까 그만 울고 들어가"
울고 있는 직원한테 끝까지 면박 주는 점장이나, 우는 와중에도 상사한테 따박따박 할 말 다 하는 나나, 둘 다 보통내기가 아니었는데, 어쨌든 돈 주는 사람은 점장이니 아쉬운 입장은 나였다.
원망스러운 점장을 뒤로하고 백화점을 벗어나 한참을 걷는데, 소나기처럼 마구 쏟아지는 눈물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엉망이 되어버린 몰골을 감추기 위해 건물 화장실로 들어갔다.
대표의 조롱, 온갖 황당한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징계위원회, 재판장에서 이어지는 거짓 증언들, 임금체불로 몇 날 며칠 잠 못 이루는 불안한 재정상태, 바닥난 체력으로 꾸역꾸역 좀비처럼 기어 나오는 명품관에서까지 이어지는 점장의 갑질에도 나는 스스로에게 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중대한 결정을 할 때마다 이성이 나서서 계산기를 두드렸고, 감정은 뒷방으로 보내 고개를 처박고 겨우 숨만 고르게 했다.
당장 생존하기 바빠 죽겠는데 감정이 개입되면 차질만 생기니, 나에게 감정이란 빨리 치워버려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게 어거지로 삼킨 설움들이 체내에서 분해된 줄 알았는데, 장기 이곳저곳에 켜켜이 쌓여 있었는지, 눈과 코를 통해 하염없이 토악질을 했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껏 울지 뭐.
그렇게 세면대 앞에서 물을 틀어 놓고 삼십 분이 넘도록 오열했더니 눈은 뜨기 힘겨울 정도로 팅팅 부어올랐고 목은 쉬다 못해 아예 잠겨버렸다. 엉망이 되어버린 몰골을 수습하기 위해 들어왔다가, 더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허나 만신창이가 된 얼굴과는 반대로, 마음은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간 듯 개운해졌다. 그동안 철저히 무시해 왔던 설움들을 모두 꺼내 놓으니, 먹구름처럼 둔탁했던 감정이 한결 가뿐해진 것이다.
감정은 오랜만에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준 게 고마웠는지 기특한 메시지들을 보냈다.
'마음껏 울 수 있게 허락해 줘서 고마워'
'지금 내가 나서면 방해밖에 안 되니, 당분간은 이성에게 모든 걸 양보할 게'
'대신 복수는 끝까지 완성해 줘. 그것만이 내가 온전히 치유될 수 있고, 다시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
그간 힘들다고 투정만 부릴까 싶어 등한시했던 나의 감정과 마주해 보니, 예상보다 훨씬 철들어 있어 안쓰럽고 미안해졌다.
가장 순수하고 투명해야 할 감정인데 말이다.
나는 감정에게 무조건적인 침묵을 강요했던 지난날의 과오들을 사과하기로 했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그러나 누구보다 완벽하게 만회할 것이다.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해진 얼굴로 명품관에 출근한 소송녀는
평소처럼 검은 드레스로 갈아입고 소공녀로 위장했다.
이제부터 모든 결정권의 바통을 이성에게 쥐여주었으니
차가운 머리를 굴려 얼마나 전략적으로, 기발하게 조질 수 있는지에만 집중할 것이다.
그렇게 대표를 향한 복수의 서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