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 복수의 서막을 열다.

명품관 생존기 (수필-6편)

by 손서율


대표가 본색을 드러낸 시점은 기습적인 해고 통보에서 시작되었다.


“대표님께서 시나리오 결과물이 미흡하다고 함께하지 못하겠다고 하시네요. 이틀 내로 정리 부탁드려요”

“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컨펌한 적 없다가 갑자기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정리해 주세요”

“길거리에 나앉으라는 것도 아니고, 당장 이틀 안에 어떻게 정리합니까? 이직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을 주셔야죠”

“회사의 손익상 빨리 정리를 해주시는 게...”

“해고는 법적으로 최소 한 달 전에 통보해 주셔야 합니다. 당장 정리를 원하시면 해고예고수당을 지급해 주세요”


당황한 실장은 전화를 끊었고,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상태에서 이 돌발사태의 원인을 파악해야만 했다.


'결과물 미흡'이라는 해고 사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 4개월간 시나리오 분량이 250페이지가량 쌓여가고 있을 동안 철저히 방치해 왔던 대표가, 작가에게 피드백 한마디도 없이 별안간 해고를 통보한다는 게 이치에 맞지 않았다.




대표는 그동안 시나리오 업무는 뒷전이고 엉뚱한 곳에 나를 써먹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시나리오 직무와 관련 없는 IT 전시장 부스로 보내 회사 홍보영상 촬영을 강요하거나, 업무 미팅은 주말밖에 시간이 되질 않는다며 사업장이 있는 전라도까지 불러내어 짧은 커피 미팅 이후 곧바로 자신의 지인들 술자리에 합류시켰다.


나는 순진하게도 대표가 바빠서 시나리오 컨펌을 미루는 줄 알았고 아무런 피드백이 없는 답답한 상황에서 홀로 회차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애초부터 실행할 생각도 없었던 프로젝트를 내세워 나를 채용한 저의가 뭐였을까?”

알 수 없는 대표의 꿍꿍이를 파악해 보려 해도 회사는 전라도에 있었고 나는 홀로 재택근무를 해 온 터라 내부 사정에 깜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재직자들의 후기가 있는 채용사이트에 기업 이름을 검색해 보니 기업 평점 5점 만점에 1점대인 불량 기업이었고, 온통 대표에 대한 혹평이 쏟아지고 있었다.


‘대표 마인드가 최악이며 내로남불, 업무 미루기, 돈 가지고 장난치기 등 기업이 할 수 있는 모든 나쁜 짓은 다 합니다.’

‘해고하고 싶은 직원이 생기면 안 자르고 퇴사시키려고 어떻게든 괴롭힘. 야근하면 야근 수당 없고 휴가로 처리함. 한 달에 한 명 이상 퇴사 하는 중’

‘진짜 별것도 아닌 걸로 맨날 사유서 쓰게 함. 너무 충격적이었음’


재직자들의 분노 어린 증언들 사이에, 대표가 나를 채용해 놓고 방치해 왔던 이유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들을 찾을 수 있었다.


‘정부 지원사업만 진행하고 기간 끝나면 버려서 열심히 일해도 어디 내놓을 만한 게 없음’

‘인력파견이 다인 회사, 실제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0개’

‘그럴싸하게 보여주기로 만들어서 정부 지원금 바짝 당기는 게 목표’


재직자들의 증언 그대로, 대표는 IT사업, 인력 파견 사업, 게임 개발사업 등 여러 분야의 정부 지원사업을 문어발 식으로 진행하고 있었는데,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게임 IP를 애니메이션으로 확장하여 새롭게 콘텐츠 사업으로 추진한다는 취지로 나를 채용했었다.


그러나 입사한 지 3개월 차부터, 콘텐츠 관련 법인을 세울 건데 대표자 명의를 내 명의로 빌려 쓰겠다는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제 보니 대표는 콘텐츠 창업 지원금을 받아낼 수 있는 타인의 명의가 필요했을 뿐이었고, 출간 작가인 나의 신분이 보증수표와도 같았던 것이다.


대표가 나를 방치했던 이유는, 애초부터 시나리오 컨펌 따위는 필요 없었다. 허울만 갖추면 지원금을 받아낼 수 있으니 오로지 분량만이 필요했던 거였다.




대표의 얕은 계략에도 내가 명의를 내어주지 않자, 결국 본색을 드러낸 대표는 임금 체불과 온갖 누명을 뒤집어 씌워 무급정직 징계를 내리며 해고를 유도했다.


<대표의 패턴>

1. 오로지 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한 일회성 인력 채용

2. 지원금 수령 후, 단물 빠진 직원에게 누명을 씌워 해고 유도

3. 백기를 든 직원은 조용히 퇴사


그동안 철저히 학습해 온 대표의 패턴이 틀림없다. 이런 식으로 채용과 해고가 끊임없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기적의 창조경제를 무한 가동하며 나랏돈으로 호주머니를 불려 가던 대표는, 어느 날 면접 자리에서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한 여작가를 만나게 되는데... 그건 바로 나였다.


"작가님을 고용하는 게 걱정돼요. 상당히 진취적인 성향인 것 같아서 남 밑에서 일할 수 있을까 싶네요"

대표는 면접 자리에서 위와 같은 말을 반복하며 마지막까지 나의 채용을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단 한 번도 “남 밑에서 일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었던 나는 생소한 피드백에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았는데, 훗날 대표가 본색을 드러내고 나서야 흩어진 퍼즐이 맞춰지듯 그 말속에 숨겨져 있던 본래의 문장이 완성되었다.


"너를 고용하는 게 걱정돼. 니 명의로 정부 지원금을 받아낸 뒤에 온갖 누명을 뒤집어 씌워 해고시킬 건데,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 같아. 멍청해 보이지가 않거든"이라는 뜻이었다.


놀랍게도 대표의 우려는 적중했고, 예상보다 훨씬 큰 재앙으로 다가왔다. 늘 하던 패턴대로 기습적으로 해고를 통보하고, 멀쩡히 만근한 임금을 체불하고, 근무태만 누명을 뒤집어 씌워서 징계위원회를 열고, 무급정직 4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내리고, 직원들을 법정으로 내보내 거짓 증언을 시키고, 법무법인까지 선임해서 나 하나 짓밟겠다고 총력을 다했건만


이 독한 년은 명품관 아르바이트로 몸빵 하면서 한 푼 두 푼 모은 시급으로 KTX 표를 사서 왕복 7시간이나 걸리는 전라도까지 내려와 재판에 직접 참석했고, 월급도 밀린 처지에 어디서 능력 있는 노무사까지 착수금 없이 선임해 와 맞섰다.




아마 대표는 이 싸움이 꽤나 재미있었을 것이다.

본인이 설계한 덫에 모두가 굴복해 왔는데 처음으로 맞서겠다는 변종을 만난 것이다.


자신이 생계권을 쥐고 있던 취약체가 자신을 이겨보겠다고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걸 지켜보는 게 너무나 즐거웠는지, 월급 한 달 치만 지급하면 끝났을 분쟁을 그보다 훨씬 비싼 변호사 수임료까지 지불하면서 이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건방진 쥐새끼가 감히 소송을 해보겠다고 월급도 못 받고, 다른 곳에 취업도 금지된 상황에서 본인이 선임한 법무법인을 상대로 싸워야 하니 독 안에 든 쥐로 보였겠지.

본인은 그저 흐뭇하게 독 안을 들여다보며, 쥐새끼의 최후를 즐기는 관람료로 변호사에게 수임료를 쥐여주었을 거다.


하지만 대표는 망각하고 있었다. 면접 날 나를 두고 오랫동안 채용을 고민했던 그때의 불길한 느낌.

정부와 지자체를 속이고, 수많은 근로자들을 속이며 배를 불려 온 숙련된 사기꾼의 촉. 그 기민하고 예리한 자신의 촉이 보내는 위험 감지 사이렌을 잊었던 것이다.




대표의 눈에는 고작 떼인 월급을 되돌려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리석은 소공녀로 보였겠지만,

내가 설계한 복수는 대표의 회사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세금에 빨대 꽂고 있는 모스키토 같은 대표의 파이프라인을 파괴하는 것. 그것이 소공녀로 위장한 소송녀의 진짜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고용노동부에 임금체불 확인서를 발급받은 다음, 국내 메이저 채용 사이트 3사인 잡코리아, 사람인, 인크루트에 제출했다.


임금체불 내역은 즉각 불량기업으로 심사되어 채용사이트 3사 모두 이용 권한이 정지되었고, 대표의 가장 주된 사업이었던 인력 파견 사업에 즉각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더 이상 채용사이트에 공고를 올릴 수 없으니, 원청업체에 파견할 인력을 구할 수 있는 루트가 모두 막혀버린 것이다.


대표는 오기가 붙었는지 인력 채용을 포기하면서까지 재판을 그대로 강행했다.


당시 재판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는 나와는 달리, 대표는 재판장에 대리인을 보내놓곤 보란 듯이 SNS에 유럽여행 인증샷을 올리고 있었는데, 프랑스에서 재판 결과를 보고받으며 실컷 비웃었을 것이다.

고작 떼인 월급이나 받겠다고 전라도까지 내려와 재판관들에게 징징거리는 하찮은 인생이라고.




치열한 공방 끝에 <부당정직 구제신청> 1심 재판에서 승소한 나는 판결문을 손에 넣었고, 대표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어차피 1심이었기 때문에 계속 항소하며 시간을 끌면 월급이 밀린 노동자가 결국 무너지는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재판으로만 싸울 줄 알았던 건 대표의 큰 오산이었다. 나에게 1심 판결문은 미사일도 되고 어뢰도 되고 핵으로도 활용이 가능한 만능무기였으니까.


그동안 고된 명품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드라마 더 글로리의 문동은 마냥 삼각김밥으로 곡기를 채우고 청심원으로 입가심하며 머나먼 타지의 재판장을 오가던 개고생들 덕분에,

암행어사의 마패와 같이, 들이밀기만 하면 무한 공격할 수 있는 프리패스 문서를 손에 넣은 것이다.


나는 곧장 회사의 창립 배경을 조사했는데, 정부에서 전라도에 혁신도시를 육성하기 위해 기업유치 보조금을 풀었던 연도에, 인천 출신이었던 대표가 거주지까지 전라도로 옮기면서 지원금을 최대치로 땡겨 받아 창업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정부 지원금을 몇 억 단위로 받아낸 대표는, 추가로 허위 사업 제안서를 꾸며내어 더 많은 정부 지원금을 챙겨야겠다고 학습했을 것이고,

허위 제안서로 지원금을 쉽게 받아내기 위해서는 기업 신뢰도를 높여놔야 유리하다고 생각했는지, 온갖 지자체에 신청 서류를 넣어 수많은 수식어를 붙여 나가고 있었다.


1. 전라남도 유망중소기업 선정

2. 전라남도 일자리 우수기업 선정

3. 고용노동부 강소기업 선정

4. 고용노동부 근무 혁신 인센티브제 기업 선정

5. 중소벤처기업부 인재 육성형 중소기업 선정

6. 중소기업중앙회 참 괜찮은 중소기업 선정

7. 여성가족부 가족친화인증기업 선정

8. 여성가족부 양성평등 유공 표창 수상


이렇게 수많은 기관에서 인정한 모범 기업의 타이틀과는 다르게, 대표에게 갑질 피해를 입은 재직자들의 증언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이 괴기스러웠다.


나는 재판 판결문, 임금체불 확인서, 재직자들의 피해 증언 글, 채용사이트 3사에서 불량기업으로 심의되어 이용이 정지되었다는 안내문을 모두 취합하여 하나의 파일로 만들고, 모든 기관의 담당자에게 수상 자격을 박탈해 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이미 공식적으로 수상이 이루어진 후였기 때문에 지자체 담당자들은 난처함을 감추지 못했고, 다시 검토해 보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나는 수많은 지자체들을 상대로 하나하나 독촉하는 것보다, 좀 더 쉽고 빠르게 박탈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했는데, 메일이 아닌 국민청원으로 정식 민원을 넣으면 처리 기록이 그대로 남기 때문에 담당자들이 훨씬 적극적으로 민원을 수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모든 지자체에 국민청원을 통해 동일한 요청 내용을 접수하니 하나둘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번에 메일 주셨던 내용 청원으로 다시 넣으셨더라고요. 처리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내부 회의를 거쳐 해당 기업의 수상 자격을 박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부터 자격이 박탈된 거죠? 자격을 박탈하게 된 사유가 적힌 공문서를 메일로 송부해 주세요"

"예, 메일로 송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기관들은 자격 박탈을 증명하는 공문서를 보내기 시작했고,

그 공문서들을 한데 모아, 대표의 진짜 주종목인 인력 파견 사업의 원청업체인 공기업에 임금체불로 모든 수상내역이 박탈된 불량기업 하청업체와의 거래를 단절해 달라는 청원을 넣었다.




그저 독 안에 든 쥐새끼의 최후를 즐기려 했던 대표는 생각지도 못한 비상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모든 채용사이트 이용 정지, 그동안 수상했던 모든 지자체에서 수상 자격 박탈 및 블랙기업으로 등극, 회사의 가장 중요한 고객인 원청업체의 신뢰도 손실까지...


아킬레스건만 골라 그어대는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대표를 위해 서프라이즈로 깜짝 손님들까지 사무실로 보내주었다. 창업했을 당시 기업유치 보조금을 지급했던 지자체에 민원을 넣어 감사 인력을 사무실로 보낸 것이다. 감사원들은 직접 사무실로 찾아가 신고 내용에 대하여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방에서 두들겨 패는데도 오기가 올라 이성을 상실한 건지, 체불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버티는 대표님을 위해, 친절한 나는 기꺼이 더 두들겨 패주기로 했다.


언제까지? 임금을 뱉어낼 때까지.

뱉어내지 않는다면? 회사가 가루가 될 때까지.




지금까지 박탈해 온 유망중소기업, 참 괜찮은 중소기업, 강소기업, 가족친화인증기업이라는 두루뭉술한 수식어는 기업 신뢰도 상승을 위한 부수적인 수상 내역에 불과했다면.


대표가 실질적으로 정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경로는 IT 기술사업 분야였다. 처음부터 지식정보문화기업 유치 보조금을 지원받아 창업한 회사였기에, 정부에서 IT 지원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실체 없는 개발 제안서를 제출해 배를 불리고 있었는데,


내가 최후의 보루로 박탈시키지 않았던 수상 내역이 이제 딱 하나 남았다. 대표에게 가장 소중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ICT 장관상>이었다.


대표는 ICT 장관상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IT 산업계의 검증된 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고, 이 수상 내역 하나만으로 정부 지원금 선정 요건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비윤리적인 기업이라는 것을 고발한 것에 그쳤지만, ICT 장관상을 박탈시킨다면 이 회사가 가진 기술 전체가 허위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담당자는 임금체불과 부당정직 이력만으로 수상내역을 박탈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이건 기술적인 분야라서 기업의 사회적 물의만으로는 박탈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허위 사업에 관한 증거들을 모아두었습니다. 증거를 첨부하여 국민청원을 통해 다시 요청드리겠습니다."


내가 IT 분야와 전혀 관련 없는 팀의 시나리오 작가로 채용된 상태에서, 대표의 허울뿐인 IT 사업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던 계기는,

입사 초기에 대표가 시나리오 직무와 관련 없는 전시장 부스로 보내어 회사 홍보영상 촬영을 강요했을 때였다.


당시 킨텍스에서 개최된 디지털 테크쇼 행사장에서 가장 큰 평수의 부스를 꾸며놓고, 자체 개발한 IT 솔루션을 홍보하고 있었는데,

부스에 있는 직원은 꼴랑 그래픽 디자이너와 일일 아르바이트생 둘 뿐이었고, 관련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대표가 건네준 자료만 달달 외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디자이너에게 캐물었더니 개발자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제안서를 디자이너가 모두 작성하고 있었고, 회사 홈페이지에 자체 개발했다고 홍보하는 IT 솔루션 링크를 클릭해 보면 모두 비활성화 상태였다. 그저 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해 보여주기식에만 그치는 허위 사업들인 것이다.


나는 회사 사이트에 접속하여 디자이너와 나누었던 메시지들을 모두 캡처했고, 당시 부스에 있던 일일 아르바이트생의 전화번호와, 홍보 링크가 모두 비활성화되어 있는 회사 홈페이지를 첨부하여 국민청원으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허위 사업을 고발하였고, 결국 ICT 장관상마저 박탈시켰다.


이제 이것이 또 다른 마패가 되어, 대표가 IT 지원 사업을 응모할 때마다 장관상 박탈 이력을 지자체에 전달하기만 하면 즉시 제명될 것이었다.




결국 기존의 기업으로는 더 이상 경제 활동이 불가능해진 대표는, 법인명을 바꾸고 바지사장을 대표로 앉힌 뒤 자신은 물러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동안 대표가 만든 브랜드와 차곡차곡 쌓아온 연혁들이 흔적도 없이 증발한 것이다.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대표가 본인이 지은 법인명에 얼마나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네이밍에는 대표의 나르시시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난날 내게 누명을 씌우고 징계위원회를 열어 회사로 소환했을 때, 직원들 앞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며 눈물을 삼켰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삐까번쩍하게 리모델링한 사무실 인테리어였는데,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벽면에 요란한 기업 로고와 법인명이 이곳저곳 도배되어 있는 대표의 사무실을 둘러보며 영원히 간판을 내리게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나의 복수는 감정이 일절 섞이지 않은, 철저히 실리적이고 행정적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구조였는데, 이 방식은 대표의 방식과 쏙 빼닮았다.

이유 없이 사유서를 쓰게 하고, 업무 PC를 빼앗아 근무 기록을 조작하여 근무태만으로 징계위원회를 열고, 일하지 않았다며 임금을 체불하고, 해고를 통보하는 식으로 기업이 쓸 수 있는 모든 행정 권한을 총동원해서 많은 사람들을 무너뜨려왔다.


그동안 대표가 만나온 직원들은 그저 화를 내거나 눈물을 보이는 것이 전부였을 거고, 본인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우월감으로 점점 대범해졌을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대표에게는 가장 대표와 닮은 방법으로 갚아줘야 한다. 나는 화를 내고 슬퍼할 시간에,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행정적인 무기를 총동원해서 회사를 무너뜨렸다.

게다가 나의 복수는 얼마나 공익적인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허위 사업으로 세금을 축내는 불량기업을 마땅히 때려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해고 예고수당인 월급 한 달 치만 지급했으면 깔끔하게 끝났을 일을, 온갖 권모술수로 괴롭히려다가 되려 회사가 증발해 버리다니... 나비효과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심지어 코어 사업도 아니고 정부에서 콘텐츠 사업 지원금이 나온다길래 잠깐 일회성으로 쓰고 버릴 작가를 뽑았다가 그동안의 업보를 모두 되돌려 받은 걸 보면, 인과응보는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의 이치였다.




하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표는 정직 기간 4개월이 부당하다는 1심 재판부의 판결을 거부하고 항소를 건 것이다.


이제 법인명이 사라졌으니 바뀐 법인명으로 발송한 항소장을 보곤 기가 막혔다.

애초부터 대표에겐 패배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걸까? 마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오는 하비에르 바르뎀처럼 모든 게 파멸될 때까지 주인공의 뒤를 쫓는 집요한 사이코패스 같았다.


집요한 사이코패스 VS

사이코패스도 때려잡는 불굴의 집념


회사가 사라지고 대표직에서 내려와도 굴복하지 않는 광기 VS

작가 커리어를 모두 멈추고 명품관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맞서는 광기


강 대 강, 아니 광 대 광

서로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으니, 한 명이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라운드는 이어질 것이다.




1라운드를 총력전으로 완승한 나는,

2라운드는 기존 판결이 뒤집히지 않도록 철저한 방어전을 펼치기로 다짐했다.


남은 정직 기간은 2개월, 딱 2개월만 명품관을 병참기지 삼아 전쟁을 이어나가자.

가혹한 육체노동도, 점장의 치졸한 갑질도 이 전쟁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기꺼이 견딜 것이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그렇게 복수의 서막을 연 소공녀는 오늘도 명품관에서 VIP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