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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원 아주머니와의 우정

엄마와 딸 나이로 만난 인연

by 손서율

"안내 방송드립니다. 잠시 후 7시 30분부터 건물 내 모든 층이 전체 소등될 예정이오니 참고 바랍니다."


텅 빈 사무실에서 넋이 나간 상태로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안내 방송이 나왔다.


"하... 집에 어떻게 가지? 망했네"


퇴근 시간은 6시였지만 사무실에서 잃어버린 카드 지갑을 찾느라 아직도 집에 못 간 것이다. 오늘 하루 종일 사무실 밖으로 지갑을 들고나간 적이 없는데 한 시간 반 동안 사무실 곳곳을 이 잡듯이 뒤져봐도 나오지 않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할 수 없이 은행 어플을 이용해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았다. 핸드폰만 있으면 출금이 가능한 정말 편리한 세상이다.


돈을 인출하고 나오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드지갑이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니까?"


"그러게 사무실 사람들이 훔쳐 갈리는 없고.. 책상도 들어내 봤어?"


"다 들어내고 난리도 아니었어 아무리 뒤져도 절대 안 나와"


"말도 안 돼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지갑도 지갑이지만 법인카드랑 다 들어있는데 어쩌지? 재발급받으려면 분실 사유서도 써야 되는데 최악이야"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교통카드를 사러 편의점으로 향했다. "혹시 교통카드 파나요?"라고 묻는데 수화기 너머로 친구가 이야기했다."야! BTS 교통카드로 사~ 요즘 방탄소년단 사진 들어간 교통카드 판데"


"BTS 교통카드 파나요?" 수화기에 귀를 댄 채 내뱉은 나의 질문에 편의점 사장님은 세상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시며 주섬주섬 카드를 꺼내서 펼쳐 보였다.


"그런 건 없고요 카카오프렌즈뿐이네요 핑크색 어피치 어떠세요?"


"저는 핑크색 안 좋아해서요"


지갑 잃어버린 주제에 교통카드도 예쁜 카드로 사야겠다며 턱을 괴고 한참을 고민하던 가지가지 하는 나였다.




다음날 아침,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카드 분실신고도 하지 않은 채 사무실로 출근했다.


[카드지갑을 찾습니다 / 색상:블랙 / 브랜드:아크네 스튜디오 / 연락처 : 010-****] 어제 프린트해서 화장실 한켠에 붙여놓은 안내문이 그대로 잘 붙어있는지 확인하러 갔는데 안 그래도 싱숭생숭한 와중에 변기 하나가 막혔다고 사내 설비팀이 와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평소 목례로 인사를 주고받았던 우리 층 미화원 아주머니도 함께 서계시길래 다가가서 여쭤보았다.


"혹시 조그마한 카드지갑 보신 적 있으세요? 어제 사무실에서 잃어버려서요"


"아니요? 어제 종일 청소하면서 본 적 없는데요..?"


"아네.. 혹시 보시면 말씀 좀 부탁드려요 법인카드가 들어 있어서 잃어버리면 안 되거든요"


"네 그럴게요 근데 사무실에 가져갈 사람도 없는데.. 흠.."


아주머니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사람이 없는 구석진 곳으로 급하게 나를 끌고 가시더니 엉뚱한 질문을 하셨다.


"혹시 카드지갑 크기가 작아요?"


"네 엄청 작아요 신용카드 크기랑 거의 비슷해요 근데 왜요?"


"아무래도 저기 막혀있는 변기에 카드 지갑이 들어간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서요 웬만하면 쉽게 뚫리는데 지금 설비팀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예 드릴로 변기를 들어내야 할 정도로 단단히 막혀 있다고 하네요 그동안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어제 바지 입었어요? 뒷주머니에 넣으면 빠질 수도 있잖아요"


생각해 보니 어제 나는 바지를 입었고 뒷주머니에 지갑을 넣은 게 기억이 났다.


"설마요... 물 내릴 때 본 적 없는걸요"


아주머니는 멋쩍게 웃으시며 "그렇죠? 설마 지갑이 들어갔겠어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어서 물어봤어요 아닐 거예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어 돌아서는 아주머니를 급하게 잡아 세우고 이야기했다.


"뭔가 불길해요.. 맞는 것 같아요.. 제가 함께 서있으면 범인인 거 티 나니까.. 혹시 지갑이 나오는 게 확인되시면 제자리로 오셔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아주머니는 내 등을 토닥이며 "네~ 지갑이 나온다면 자리로 가서 말씀드릴게요 여기 오지 말고 숨어 계세요"라고 하시더니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셨다.


"위이이이잉 ~~~!!!!!!" "위이이이잉~~~~!!!!!!!!!!!!!!!!" 사무실에 엄청난 데시벨의 드릴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사람들은 파티션 너머로 거북이처럼 빼꼼히 고개를 내민 채 웅성거렸다. 화장실에 붙여 놓았던 지갑 분실물 안내문을 조용히 수거해온 나는 파티션에 숨어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발 지갑이 안 나오게 해 주세요.. 개망신당하기 싫어요"


"아니지? 법인카드 찾아야지.. 사유서 쓰기 싫어요 지갑 나오게 해 주세요"


"다시 생각해 보니 너무 창피하잖아? 지금 나 때문에 설비팀 총출동해서 변기 들어내고 있는데.. 그냥 안 나오게 해 주세요 차라리 사유서 쓸게요"


"아니지.. 법카 분실 사유서 써서 팀장 승인받는 것도 머리 아프고.. 신분증도 새로 발급받은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그냥 한번 망신당하는 게 나으려나?"


지갑을 나오게 해달라고 빌어야 하나 안 나오게 해달라고 빌어야 하나 기도하는 내내 헷갈렸다.


드디어 기나긴 드릴 소리가 멈췄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아주머니께서 급하게 자리로 오시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이셨다.


"지갑 나왔어요.. 따라오세요"


이제 개망신당할 일만 남았으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아주머니를 따라 화장실로 갔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아주머니는 설비팀이 지갑을 챙겨가려는 걸 주인에게 직접 전해 주겠다며 필사적으로 지갑을 사수하고 모두 돌려보낸 다음에 나를 부르신 거였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망신도 안 당하고 조용하게 끝났네요 진짜 고생하셨어요"


"아니에요 찾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법인카드 오늘 긁어봐요 되는지.. 살면서 무슨 이런 요상한 일이 다 있데요?"


아주머니와 나는 심각하게 이야기하다 말고 이 요상한 해프닝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서로 붙잡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밤새 배수관에 박혀 있던 카드지갑은 물에 퉁퉁 불어 가죽이 흐물거렸다. 고무장갑을 끼고 카드를 다 꺼내서 세제에 박박 씻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시던 아주머니가 내 신분증을 들여다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어머 88년생이세요? 20대인 줄 알았어요~ 88년생이면 우리 딸이랑 또래네.. 우리 딸은 87년생이거든요"


"따님이 87년생이에요? 완전 또래네요 따님은 결혼하셨어요?"


"우리 딸은 어릴 때 결혼해서 애가 벌써 아홉 살이에요"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자리로 돌아왔고 정말 감사한 마음에 커피와 케이크를 사와 아주머니께 드렸다.


"어휴~ 이런 거 안 사 와도 되는데.."


"카드 잘 긁히나 테스트할 겸 사 온 거예요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엄마와 딸 나이로 만난 미화원 아주머니와의 우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눈빛만 봐도 척척 통했다.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주변 분위기가 안 좋았으면 아주머니는 상황을 살피고 귀띔을 해주셨다.


나 또한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더 번거롭고 비합리적인 제도로 청소 지침이 바뀌어 불편하다고 말씀하시던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곤 내가 불편함을 느낀 것처럼 총무 팀에 건의사항을 넣었다.


아주머니는 내 자리 쓰레기통을 비워주실 때마다 나오는 요거트 빈 곽을 보시며 걱정하셨다.


"밥은 잘 챙겨 먹어요? 맨날 요거트로 때우는 거예요?"


"요거트는 후식이에요 너무 잘 먹어서 살쪘어요~"


나도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면 아직도 식사를 못하신 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를 보곤 걱정이 되어 여쭤보았다.


"식사는 언제 하러 가세요? 시장하실 것 같은데.."


"이제 곧 가니까 걱정 마세요~"


옆자리에 앉아도 인사 외엔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일이 다반사인 사무실에서 서로의 끼니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았다.


아주머니는 내가 머그컵을 닦을 때 옆에 앉아서 종종 나의 연애사업을 조심스레 물어보시며 걱정하셨다. 결혼 이야기가 올드미스에겐 무례한 질문이라 하지만 나는 아주머니의 걱정이 부모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염려라는 게 느껴져서 도리어 좋았다.


아주머니는 내가 서른네 살이나 먹고도 BTS 교통카드를 탐내는 사실도 모른 채 매번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어요"라는 말로 나의 결혼을 기원해 주셨다.




"여기 출근하는 것도 이제 일주일 남았네요"


어느 날 아침, 어김없이 머그컵을 닦고 있는데 옆에 앉아 조용히 지켜보고 계시던 아주머니의 입에서 슬픈 말이 나왔다. 어느덧 계약 기간이 끝나서 그만두셔야 할 때가 온 거였다. 누구보다 깔끔하시고 일도 꼼꼼하게 잘하셨는데.. 그깟 계약기간 때문에 그만두셔야 한다는 게 슬펐다.


오랜 세월 회사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해도 정든 사람과의 이별은 항상 마음 아프다.


아주머니의 마지막 퇴근길, 아주머니는 내 자리로 오시더니 "저 이제 갈게요"라며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아주머니가 마지막으로 타시는 엘리베이터까지 함께 걸어갔다.


"안 따라 나와도 되는데 어서 들어가요~"


"마지막 퇴근길인데 배웅해 드려야죠~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애꿎은 엘리베이터가 너무 빨리 와버렸다. 아주머니는 엘리베이터에 타시곤 "조만간 꼭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어요"라며 마지막까지 나의 결혼을 기원해 주셨다.


"매번 기도해 주신 덕분에 곧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의 인사에 아주머니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그렇게 나는.. 원인 모를 드릴 소리의 비밀을 나눈 비밀친구를 잃었다.


주말이 지나고 새로 돌아온 월요일,

텅 비어있는 의자 옆에서 머그컵을 씻다가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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