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모두가 풀어야 할 숙제
"38,500원입니다."
캐셔의 이야기에 주섬주섬 카드를 꺼내어 건넸다.
<영수증>
생연어 한 팩 15,000원
아보카도 5개 10,000원
아스파라거스 6,000원
방울토마토 5,000원
새송이버섯 2,500원
- 총합계 : 38,500원
바로 앞에 39,000원어치 계산을 하고 나간 남자와 거의 같은 금액이다. 놀랍게도 부피는 2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배가 만삭의 임산부처럼 불룩 솟아 있는 남자가 카트에서 꺼내 무빙 레일에 올려놓은 것들은 대부분 냉동식품, 라면, 과자, 빵, 탄산 음료수였다.
라면 5개 묶음 2봉지니까 10끼는 해결이 가능하고 사이드로 냉동만두를 함께 곁들인 후 후식으로는 과자와 빵, 음료수로 마무리한다면 맛있고 배부른 완벽한 코스의 10번의 끼니가 된다. 내가 산 음식은 3끼로 나누어 먹을 양이고 심지어 음료와 후식도 없는데 말이다.
밖에서 사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12,000원짜리 트레이 한상 가득 채운 돈까스, 메밀 소바 정식 세트와 12,000원짜리 닭 가슴살 한 피스 외엔 모두 야채로 이루어진 샐러드가 같은 가격인 걸 보면 알 수 있다.
확실히 건강에 좋은 음식은 가성비가 최악이다. 양이 적고 비싸며 마음의 평화를 불러주는 정제 탄수화물도 없다.
30대가 넘어서면서 매 끼니는 아니지만 대부분 가성비가 안 좋은 음식들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굳이 가성비가 안 좋은 음식들로 삶을 채우는 이유는 내 몸에 고급 연료를 주기 위해서다.
워렌버핏은 우리 몸을 자동차로 비유한다.
어느 날, 문득 램프의 요정이 나타나 당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자동차를 선물해 줄게 커다란 리본을 묶은 자동차인데 당신 꺼야" 그런데 램프의 요정은 이런 조건을 붙입니다. "단, 이 자동차는 당신이 갖게 될 처음이자 마지막 자동차야 평생 이 차만 타야 해" 만약 램프의 요정으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나는 자동차 설명서를 다섯 번 이상 읽고, 주차도 지붕이 있는 차고에 할 것이며 차에 아주 작은 흠이라도 나면 곧바로 고쳐 놓을 겁니다. 평생 동안 타야 하는 자동차니까요
여러분은 이런 마음을 여러분의 정신과 육체에 갖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정신과 육체는 딱 하나밖에 없고 이것을 갖고 평생을 보내야 합니다. 당장 1~2년만 타려면 대충 관리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30~40년 후에 여러분의 육체는 고장 나서 삐걱거릴 겁니다. 오래 손질하지 않은 자동차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의 육체와 정신은 여러분의 마지막 자동차입니다. -워렌버핏, <스노우볼>-
워렌버핏의 이야기를 들으니 새삼 충격적이었다. 내 몸은 80년가량 나의 영혼을 태울 첫차이자 마지막 차였다니.. 그동안 나는 이번 생에 주어진 단 한대의 차 주유구 뚜껑을 열어 각종 알콜과 나트륨, 글루텐, 화학조미료를 들이붓고 살았던 것이다.
20대 때는 인생이라는 전체의 시간이 와닿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미지수의 시간들이 마치 내가 영원히 살 것 같은 생각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친구들이랑 밤새워 새벽 다섯 시까지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놀이동산에 가고 싶다며 취한 상태로 첫차를 타고 놀이동산 입장시간에 맞추어 입장해서 오후 5시까지 놀고 그대로 저녁 타임 아르바이트를 가서 일하는 도중에 곯아떨어진 적도 있었다. 아직 60년은 더 끌어야 하는 차에 알콜을 들이붓고 도로에 불붙도록 드리프트를 하는 격이었다.
게다가 내 입에 넣는 음식들의 성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위장 사정은 모르는 일이고 당장 눈과 입을 현혹하는 음식들이 매 끼니 식사 메뉴가 되었다. 지금도 좀 전에 먹은 음식들이 내 몸속에서 세포 하나하나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말이다.
영원히 빵빵한 엔진으로 힘차게 질주할 것 같았던 34년식 내 차에 올해부터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51.5kg..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고 다시 체중계에 올랐다. 몸무게가 1.5kg 증가한 것이다. 고작 1.5kg 찐 거 가지고 유난스러운 반응이라 생각하겠지만 20년이 넘도록 50kg를 유지해 온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루에 두 끼, 그중에 한 끼는 샐러드, 16시간 공복 유지, 하루 1500 kal 미만 섭취, 최소한의 탄수화물로 엄격하게 식이 관리를 해봐도 늘어난 체중은 몇 개월간 전혀 줄어들 생각을 안 한다.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을 납득할 수 없었는데 원인은 노화로 인한 신진대사 저하로 기초대사량이 떨어져서였다. 엔진이 노후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소위 말하는 나잇살이 붙기 시작한 거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살까지 붙다니 세월은 이렇게나 잔인하다. 인간은 20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노화가 시작된다는데 80살까지 산다고 가정해도 인생의 3/4는 노화와 싸우며 살아야 한다.
노후된 엔진을 조금이나마 되돌리는 방법은 이제 운동밖에 없다. 운동이라면 질색하던 나에겐 그동안 숨쉬기 운동이 유일했지만 늦게나마 홈트레이닝부터 시작했다. 요즘은 홈트레이닝도 난이도가 꽤 높아서 30분만 따라 해도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
단기간만 보고 무리하게 운동하면 질릴 수 있으니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평생의 꾸준한 습관으로 만드는 게 요즘 나의 목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음식을 먹기 전 대략적인 성분을 체크해 보는 습관은 이미 몇 년 전에 들여놓았다. 내 몸이라는 차에 지금 휘발유를 넣고 있는 건지 폐유를 넣고 있는 건지 매일 매끼 체크하고 있다.
라면, 김밥, 치킨 = 맛있고 살찜
예전에는 음식을 보는 시야가 이렇게 단순했다면
라면 = 정제 탄수화물 + 나트륨
김밥 = 정제 탄수화물 + 야채
치킨 = 단백질 + 포화지방 + 나트륨 가득
지금은 이런 식으로 좀 더 디테일 해졌다.
요즘은 배달음식을 시켜도 회덮밥이나 편백찜 등 최대한 건강한 성분의 음식을 시키려고 노력한다. (물론 치팅데이는 가끔 가져야 한다.)
하지만 갈 길은 아직 한참 멀었다. 나의 주방 한켠엔 여러 종류의 영양제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바로 옆에는 와인 빈병들도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는 걸 보면 앞으로 술을 더 줄이고 한층 더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셀 수없이 많은 날들 중에 임팩트 있는 사건들을 기억해 낼 뿐이다. 그러나 우리 몸은 기억에서 사라진 수많은 날들을 고스란히 살아내고 있으며 매일 무심코 반복하는 습관들을 차곡차곡 누적하고 있다.
이 누적된 기록들이 결과로 나오는 일반적인 시점은 중년부터이다. 중년이 되어도 앞으로 살날은 한참 남았는데 말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 몸은 평생 동안 치열하게 관리하며 살아야 하는 게 맞다.
요즘 바디 프로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슬림하고 탄탄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그들의 완벽한 몸은 차로 따지면 페라리 같다. 페라리 같은 몸을 만들려면 피눈물 나는 노오력들이 필요하겠지..
나는 이번 생엔 과감하게 페라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남은 인생은 연식이 오래돼도 밟으면 제법 잘 나가고 잔고장이 적은 자동차를 가질 수 있도록 평생 노오력!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