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모르는 "고독사" 이야기
오늘도 살아있어?"
친한 동생 슬기가 매일 카톡으로 건네는 아침인사다.
"응 오늘도 살아있어ㅋㅋ"
오늘 아침도 무사히 살아서 눈을 뜬 나는 손가락에 한껏 힘을 주곤 키패드를 꾹꾹 눌러서 그녀에게 생존신고를 한다.
우리의 괴상한 인사는 몇 달 전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을 읽은 후 싱숭생숭한 마음에 슬기에게 전화를 건 날부터 시작되었다.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은 특수 청소업체를 운영하는 저자가 방에서 쓸쓸하게 고독사 한 무연고 시체가 방치된 집들을 청소하며 겪은 과정들을 아주 상세하고 적나라하게 풀어낸 수필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보통 사람들에게 "고독사"라는 단어는 뉴스에서나 들을 수 있는 단어지만 내 인생에서는 아주 가까이에 와닿아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내가 속해있는 있는 최소한의 집단이라고는 생계유지에 필요한 "회사" 딱 하나다. 그 외 가족, 애인, 종교단체, 동호회, 계모임... 그 어디에도 내가 속해있는 집단은 없다.
어느 날 내가 집에 있다가 갑자기 돌연사하게 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우선 나의 부재를 가장 빨리 파악하는 곳은 매일 출근하는 회사일 것이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지각한 이력이 없어서 내가 연락도 없이 무단결근을 했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정말 의아한 상황 일 것 같다.
회사에서 나를 찾기 위해 어디로 전화를 걸려나
입사할 때 비상연락처를 적었던 것 같은데 누구 번호를 적었었지? 친구였나? 당시 만나고 있었던 애인이었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만약 회사에서 나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고 퇴사 처리를 해버린다면 나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훨씬 더 길어진다.
주변에 지인이나 친구들은 제법 많지만 매주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따로 없고 연락하다가 뜻이 맞으면 만나왔으니 누군가 나에게 연락했을 때 오랜 기간 답장이 없다면.. 알 수 없는 이유로 단단히 화가 나서 연락을 피하고 있는 거라고 오해하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 여차저차 나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해도 장례는 누가 치러야 하나? 상주로 지목할 사람이 딱히 없다.
게다가 정말 놀라운 사실은 대한민국의 법률 중에 장사법이라는 게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장사법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16호 연고자의 권리, 의무는 각 목의 순서로 행사한다.
가. 배우자
나. 자녀
다. 부모
라. 자녀 외의 직계비속
마. 부모 외의 직계존속
시신의 장례를 치를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연고자의 범위 중에 가장 마지막 순위가 "마. 부모 외의 직계존속" 즉 형제다.
친구나 지인은 장례를 치러줄 수 없고 심지어 삼촌과 조카 사이도 법적인 연고자에 들어가지 않아 장례를 치러줄 수 없다.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발급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장사법에 명시된 직계가족뿐이다.
실제로 고인과 몇십 년을 함께 살아온 친구에게 장례를 치를 수 있는 법적인 권리가 주어지지 않아 처벌을 받는 한이 있어도 장례를 어떻게든 치러주겠다는 친구의 주장이 무시되고 결국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된 사례가 있다.
또한 장례를 치러줄 사람조차 없는 무연고자 시신에는 의료법 자체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시신이 의료폐기물로 인정되지 못하고 일반 쓰레기로 간주되어 사체를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릴 수밖에 없다고 현직 특수 청소부들은 토로한다.
내가 지금까지 낸 세금이 얼만데 당연히 국가에서 장례를 치러줄 줄 알았다만.. 내 몸이 쓰레기봉투에 담긴 채 무분별하게 버려질 수 있다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2020년 8월부터 신청서를 구청에 따로 제출하면 내부 심의를 거친 후 임시로 연고자를 지정할 수 있는 보건복지부 지침이 새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렇게 별도의 신청서 제출과 심의를 거쳐 승인을 받는 과정 없이는 여전히 장례를 치를 수 없다.
무연고자인 내가 만약 오늘 욕실에서 발을 헛디뎌 뇌진탕으로 죽는다면 한 달 뒤에 쓰레기봉투에 담길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죽어서 쓰레기봉투에 담기는 신세를 면하려면 결혼을 해서 직계 가족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외로운 인생이다. 매일 웃고 행복한 날들을 살고 있어도 병원에서 당장 보호자를 불러오라고 하거나, 회사 근로계약서 비상연락처 란에 누구를 써야 될지 한참을 고민할 때 "지금 나는 철저히 홀로 살아가고 있구나" 비로소 실감이 난다.
인간은 사회성 동물이라 집단에 소속되어 있어야만 안정감을 느끼기 마련인데 나는 이렇게 철저하게 혼자 살고 있어도 원래 별종이었는지 아니면 별종으로 진화한 건지 그다지 외롭지 않다.
이렇게 글 쓰는 걸 좋아해도 그 흔한 글쓰기 모임, 독서 모임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여행도 대부분 혼자 다니며 배를 타고 3시간을 꼬박 들어간 울릉도에서 9일가량 혼자 잘 먹고 잘 살다 돌아오는 인간이니까.. 게다가 10년 넘게 혼자 살아왔지만 요즘 나 빼고 다 가지고 있다는 고양이 한 마리 조차 키우지 않는다.
이렇게 외로움을 거의 느끼지 않는 나 자신을 보면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진화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종종 짠하다.
그래도 이런 나를 불쌍하게 여기진 않기로 했다. 외로움에 적응이 됐든 진화를 했든 결과적으로는 매일 웃으며 즐겁게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왜 나는 남들처럼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걸까? 예전부터 의문이었던 이 문제의 답은 뜻밖의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깨달았다. 그것이 알고 싶다. [죽음 이후의 삶, 사후세계는 존재할까?] 편에 나왔던 심정지가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면서 잠시나마 사후세계를 체험한 사람들의 인터뷰에서 공통된 내용이 있었는데
"매우 자유로운 기분이 들고 세상의 모든 인연으로부터 벗어난 초연함을 느꼈다." <사후 체험자의 공통된 의견들>
"몸 밖으로 나왔을 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어요 나는 누구의 아내도 아니고 그냥 나 자신일 뿐이었어요" <사후 체험자 바이올라 호튼의 인터뷰 내용 中>
나는 이 인터뷰들을 보면서 격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아직 1초도 죽어본 경험이 없는데 말이다. 그동안 내가 어딘가에 결속되어 있지 않아도 외롭지 않고 자유로운 기분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싶어도 설명할 수 없었는데 나의 심경을 명확하게 표현한 문장이었다.
남들은 죽어서야 느끼는 이 형용할 수 없는 자유로움과 초연함을 벌써 알고 있다는 게 기뻐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초연함을 가지고 나서야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우울함과 외로움을 모두 초월할 수 있었다. 마치 타지에 잠시 들려 자유를 만끽하는 여행자의 시야로 삶을 살고 있던 것이다.
내 영혼은 아직 육신에 붙어있지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다니는 느낌이다. 누구의 기대도 받지 않고 나 또한 누구에게 기대하지도 않고 그냥 우연히 들른 이 세계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신기하고 감사한 기분이라 해야 하나?
그러나 잠시 들르는 세계처럼 느껴진다 해도 대충 살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이루는 게 재밌어서 자꾸 노력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마치 게임 같다. 손으로 만져지는 나의 육신은 단지 나의 영혼의 아바타이고 나는 현생이라는 맵에서 이 아바타를 키워 나가는 재미로 사는 느낌이다. 무언가를 이룰 때 레벨 업 돼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잠깐의 희열들이 모여 이 기나긴 게임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덕분에 욕실에서 발을 헛디뎠다간 쓰레기봉투에 담길 수도 있는 고독한 삶을 살아도 매일 해맑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 건 확실하다.
물론 진짜로 쓰레기봉투에 담기는 최후를 맞지 않으려면 외로움도 좀 느껴서 연애를 해야 직계가족이 생기니... 조금이나마 작은 외로움이 다가와 나의 마음을 두드린다면 그 외로움을 최대한 확대해서 느껴야 할 것 같기도..?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슬기는 내심 걱정이 되었는지 매일 아침 나에게 생존신고를 받기 시작했다.
"언니 살아있어?"
"생사확인 응답하라"
"출근? 생사확인 ㅋㅋ"
"언니 나한테 답장하기 귀찮아도 씹지 말고 ㅇ하나라도 보내"
아침부터 생존신고를 재촉하는 슬기가 귀여워서 매번 웃음이 터진다.
그리고 키패드에 힘을 주어 야무지게 한 자 한 자 적어나간다.
"응 나 오늘도 살아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