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언니~ 내 친구가 주말에 파티 연다는 데 같이 갈래?"
위드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파티 소식에 귀가 쫑긋해졌다.
그동안 회사 ↔ 집 ↔ 카페를 전전하며 노트북 앞에서 글만 쓰는 일상을 보내왔는데 눈 깜짝하니 연말은 벌써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살아있냐는 안부 인사를 받을 정도였으니.. 좀 나돌아 다닐 때가 되긴 했다.
친한 동생 윤정이의 남사친 J가 호스트로 여는 소규모 파티였는데 그는 유튜브 광고 회사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인맥을 자랑하는 마당발이라 들었다.
파티 당일이 되어 기대 반 설렘 반으로 파티 장소에 도착하니 호스트가 문 앞까지 나와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 윤정이랑 친한 언니분이시죠? 반가워요~ 저 윤정이 고등학교 불알친구 J에요"
"아 네~ 반가워요 J씨"
"네 윤정이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식사하셨어요? 뭐 좀 드세요 많이 시켜놨어요"
J를 따라 들어오니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다양한 음식, 다양한 샴페인들로 가득했다. 다들 서로 모르는 사이로, 오로지 J를 매개체로 연결된 자리였는데 파티의 숨겨진 취지를 알고 봤더니 J가 본인의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벌인 깜찍한(?) 파티였다.
J는 참석자들이 모두 모이자 오늘은 자신의 생일이라고 공표했다. 그를 생전 처음 보자마자 생일 축하 노래부터 부르게 되어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오랜만에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나름 신선한 자리였다.
흡족한 표정으로 생일 축하송과 케이크 촛불 의식을 마친 J는 파티 참석자를 한 명 한 명 지목하며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기 시작했는데 마치 [누가 제일 잘 나가] 콘테스트 같았다.
"이 형은 본업은 의사고 이번에 건강 보조제 사업을 하고 있는데 3차 완판이래요 사업이 정말 잘되고 있어요"
"여기 여자분은 나이는 어려도 이태원에 3층짜리 파티룸 사장님이세요~ 방송인으로도 활동했고요"
"이 누나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하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어요 정말 능력 있는 분이에요"
"이 분은 엄청 유명한 유튜버예요 유튜브에 ○○○ 검색하시면 나와요 이따 가시기 전에 사진 찍어 두세요"
"이 큰형님은 최고 능력자예요 돈이 엄청 많으세요 술값도 잘 내시고요 그냥 돈이 많아요"
"이분은 26살~ 이 자리에서 가장 막내예요 능력 좋은 친구예요"
이제 소개해야 할 사람은 윤정이와 나뿐이었다.
J는 윤정이에게 다가가 외쳤다.
"얘는 나의 불알친구 윤정이!! 진짜 친해요 고등학교 동창이거든요"
그러고는 옆에 앉아있는 나에게 와서 어깨를 짚으며 "이 누나는 내 불알친구 윤정이의 친한 언니!!!"라고 소개했다.
모두들 능력 있는 사업가, 사장님, 유학파 디자이너로 소개되었지만 일개 회사원인 윤정이와 나는 "불알친구"와 "불알친구의 친한 언니"로 소개되었다.
다들 "네? 불알이요?" 라며 껄껄 웃어댔는데 불길한 불알의 서막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J는 사람들이 건네는 생일주를 연거푸 들이키더니 얼마 안 가 만취해 버렸는데 자꾸만 윤정이와 나를 보며 "내 불알친구와~~~ 불알친구의 친한 언니~~~"라고 귀에 딱지가 얹도록 불러댔고
졸지에 쌍방울 자매가 된 우리에게 사람들은 "이쯤 되면 진짜 불알이 있으실 거 같아요"라는 농담을 건넸다.
파티에 온 사람들은 두둑한 명함 지갑을 꺼내 서로 명함을 교환하기 바빴다. 아직 이름조차 외우지 못했는데 자꾸만 손에 쥐여주는 명함들로 내 카드지갑은 오븐에 넣은 빵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파티에 명함을 챙겨 오지 않은 사람은 쌍방울 자매와 이 자리에서 가장 막내라는 26살 여성분까지 총 세명이었다. "우리 말고 명함을 안 가져온 사람이 한 명 있긴 있네"라고 생각하던 찰나,
J가 26살 막내에게 "너 한남○힐에서 살잖아"라고 말을 걸었고 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왜 이래~~ 어차피 부모님이 재산 한 푼도 안 물려주신대 " 라며 손사래를 쳤는데
그때 알았다. 우리는 명함이 "없는"거고 그녀는 명함이 "필요 없는" 거였다는 사실을..
막내가 한남○힐에서 산다고 하자 앞서 소개한 의사, 사업가, 해외파 디자이너, 사장님, 유명 유튜버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던 사람들이 모두 격하게 환호했다.
그렇게 오늘 밤 [누가 제일 잘 나가] 콘테스트 영예의 대상은 CEO라고 적혀있는 각종 명함들을 모두 제치고 이제 갓 20대 중반을 넘긴 한남○힐 거주자에게로 돌아갔다.
"역시 여자는 능력이 있어야 해" 내 옆에 앉아있던 사업가가 이야기하자 반대편에 앉아있던 의사가 "형님 저도 공감합니다. 요즘은 여자도 능력이 필수죠"라고 화답했는데 그들이 말하는 능력은 단지 부모님 집인 한남○힐에 거주하고 있는 걸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긴.. 요즘 세상에 금수저가 최고의 능력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막상 테이블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두 귀로 직접 들으니 마음 한켠이 씁쓸해졌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지나고 있었고 [누가 제일 잘 나가] 콘테스트 첫 번째 탈락자는 집에 가고 싶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가방을 챙겨서 나오는데
J가 "이 큰형님은 최고 능력자예요 돈이 엄청 많으세요 술값도 잘 내시고요 그냥 돈이 많아요"라고 소개했었던 큰 형님이 갑자기 외투를 급하게 걸치시더니 따라 나오셨다.
"추운데 들어가세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나는 아직 어색한 그가 부담스러워 손사래 치며 사양했지만 큰형님은 기어이 따라 나와 택시를 함께 기다려 주었다.
주황빛 가로등 아래, 쌀쌀한 밤바람을 타고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데 큰형님이 먼저 정적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사람은, 그 사람만이 풍기는 고유의 향기가 있어야 해"
"향기요?"
"응, 그런데 요즘은 향기를 가진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아, 하지만 그쪽은 본인만의 뚜렷한 향기를 가지고 있어, 분위기라고 설명해야 하나? 아무튼 오늘 함께해서 즐거웠어, 오랜만에 그런 사람을 볼 수 있어서 좋았거든"
그가 한 말의 의미가 뭔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콜택시가 도착했다.
나는 큰형님에게 함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택시에 탔는데 그는 택시 앞좌석 창문을 두드리더니 기사님께 5만 원짜리 현금을 건네면서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주세요" 라고 말하고는 쿨하게 돌아섰다.
그날 이후
큰형님에게 "밥 한번 먹자", "술 한잔하자" 같은 뻔한 연락은 단 한 통도 오지 않았다.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자
비로소 마음이 따뜻해졌다.
비록 [누가 제일 잘 나가] 콘테스트에서 첫 번째로 탈락했지만 나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는 걸
그가 다시 한번 일깨워 줬다.
※ 수필에 등장하는 파티는 위드 코로나 방역수칙에 따른 10인 이하의 소규모 파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