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하기 싫어서 템플스테이에 가게 된 사연
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11월의 주말 아침 나는 홀로 관악산 꼭대기에 있는 연주암 사찰로 향했다.
불교 신자도 아닌 내가 뜬금없이 사찰을 찾은 이유는 사실 사찰 방문 목적이 아닌, 제보다 젯밥에 관심이 있었다.
곱게 물든 단풍이 막바지에 이르른 늦가을, 나무들이 색동옷을 벗기 전에 가을산 정상에 올라 단풍의 절경을 꼭 보고 싶었는데 저질 체력인 나는 "어떡하면 등산하지 않고 정상까지 오를 수 있을까?" 꾀를 쓰던 도중, 서울에서 접근성이 좋은 관악산에 케이블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케이블카는 일반인들은 이용할 수 없으며 KBS기상청 직원들과 연주암 사찰 관계자들만 이용할 수 있었는데, 연주암 템플스테이 이용자들도 유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고 곧장 템플스테이를 예약했다.
"단풍 보러 올라간 김에 산속에서 하룻밤 자고 오지 뭐, 연말이라 소원 빌 것도 많으니 108배도 하고, 힐링도 하고, 글감도 얻어오고"
그렇게 겸사겸사의 이유로 시작된 뜻밖의 템플스테이였다.
관악산 입구로 들어서니 울긋불긋하게 물든 화려한 단풍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풍경이 장관을 이루었다. 단풍 눈을 맞으며 맑은 계곡이 흐르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듣던 데로 케이블카 타는 곳이 보였다.
커다란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훤칠한 키에 훈훈한 외모의 남자분이 백팩을 메고 서있었는데 기상청 직원이 백팩을 메고 올리는 없고 한눈에 봐도 나와 같이 템플스테이에 혼자 온 사람 같았다.
"오늘 템플스테이 오신 분은 저분뿐인가?" 의문이 들 무렵 케이블카 출발시간 직전에 사람들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친구 같은 모녀 한쌍, 수줍은 모녀 한쌍, 귀여운 커플 한쌍, 절친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두 명, 백팩남 그리고 나 이렇게 총 10명이었다.
출발시간이 되자 케이블카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발밑으로 펼쳐지는 가을 산의 절경에 홀려, 두려움도 잊은 채 넋 놓고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정상에 도착하니 작고 아담한 사찰이 나왔고, 숲 속에서 울려 퍼지는 청아한 목탁소리를 들으니 영혼까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사찰에 들어가 보살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수련복을 받아 갈아입고 나오니 아담한 체구의 비구니 스님이 우리를 맞아주셨다.
"여러분들은 윤회를 믿으시나요? 불교에서는 윤회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요"
담소를 나누던 중에 스님이 질문하셨다.
"네, 저는 무교지만 윤회를 믿어요 전생은 있는 것 같아요"
나의 대답에 스님은 고개를 깊이 끄덕이셨다.
이어서 참석자들의 간단한 자기소개와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 저녁 공양 시간이 되었고 식당으로 내려가 공양을 했다.
갓 지은 밥에 나물, 두부 부침, 김치, 우거짓국으로 오로지 채식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저녁이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먹었다.
커플, 모녀, 친구.. 다들 둘씩 와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고 혼자 와서 짝이 없는 백팩남과 나는 자연스럽게 같이 앉게 되었는데, 그렇게 우리는 1박 2일 템플스테이 짝꿍이 되었다.
짝꿍은 31살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새로 시작한 일이 힘들어서 쉬고 싶은 마음에 절을 찾았다고 했다.
"그쪽은 템플스테이에 왜 오신 거예요?"
"저는 소원 빌러 왔어요"
그의 질문에 등산 없이 정상까지 날로 먹을 궁리를 하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해 소원을 빌러 왔다고 둘러댔다.
저녁 공양을 마치자 주지스님께서 내려오셔서 불교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다.
"불교는 신에게 의지하는 다른 종교들과 다르게 내 자신이 직접 깨달음을 찾아가는 주체적인 종교예요, 내가 주인공이 되는 종교지요"
내가 주인공이 되어 주체적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너무나 멋진 교리다. 주지스님의 말씀을 듣자 언젠간 내가 종교를 가져야 하는 날이 오면 반드시 불교를 선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느덧 해가 떨어지고 어두워지자 사찰에서 더 올라가야 볼 수 있는 연주대에 오르기로 했다. 핸드폰 플래시에 의지한 채, 어두운 산길을 따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올라가다 문득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해발 629m 광활하게 펼쳐진 서울의 오색찬란한 야경 한가운데 롯데타워가 우뚝 솟아서 반짝인다. 어두운 숲 속의 사찰에서 내려다보는 속세의 빛, 저 찬란한 빛 속에서 나는 매일 하루를 바쁘게 살아내고 있었구나..
연주대 꼭대기에는 이미 스님이 올라가 계시는지 염불소리가 들려온다. 염불 소리를 따라 가파른 절벽 위로 올라 드디어 연주대에 도착했고 그곳에 계신 부처님께 간절한 소망들을 담아 절을 올렸다.
연주대에서 절을 올리고 사찰로 내려와서 "자신에게 쓰는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들 원형으로 둘러앉아 초를 켜 두고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정성스럽게 써 내려갔다.
가을 산을 보고 싶어 절에 왔지만 막상 편지를 쓰다 보니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들이 펜 끝에서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편지를 모두 완성하자, 원형 안에 스님이 들어가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편지 내용과 고민들을 들으시고는 맞춤 조언을 해주셨다.
사찰을 찾은 사람들의 고민은 나의 고민과 거의 비슷했는데 다들 "더 잘하고 싶고, 더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과 달리 뜻대로 되지 않는 괴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끝나고 어느새 내가 발표하는 차례가 다가왔다.
"저는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이루고 싶은 꿈도 많은데 그 소망들의 기한을 정해놓고 그 안에 이루어내야 한다고 제 자신을 다그쳐가며 괴롭혀 왔습니다. 저를 가장 괴롭힌 사람은 제 자신이었어요"
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시며 이야기를 듣던 스님은 앞서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았던 사람들에게 해주었던 조언과는 전혀 다른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본인에게서는 광채가 나요, 근데 자기 자신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아, 요즘은 많이 힘들어하시는 시기네요.. 매달 한 번씩 절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는 건 어때요? 마음이 힘들수록 몸을 써야 하거든요"
"한 달에 한 번이요..? 음..."
스님의 갑작스러운 봉사활동 제안에 당황해서 어버버 하는데 모든 템플스테이 참가자들과 보살님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나는 그곳에서 스님의 제안에 답을 하지 못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주말을 모두 반납하고 절에서 숙식하며 봉사를 할 수 있을지..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첫날 모든 일정을 끝내고 이른 저녁부터 다들 침소로 들어갔는데, 내가 묵는 방에 사람이 많아 숙소를 양보해 달라는 보살님의 권유에 흔쾌히 숙소에서 이불을 들고 나와 불당이 있는 큰방에서 잠을 청했다.
- 다음날 am. 4:00
새벽 4시 30분에 있는 예불에 참석하기 위해서 눈을 떴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베개를 잘못 베고 잤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씻고 나와 거대한 부처님 상 앞에서 예불을 드렸고 절을 하는 내내 나의 소망을 담아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예불이 끝난 후 짝꿍과 아침 공양을 하고 해돋이를 보러 나왔다.
"초콜릿 드실래요? 혹시 몰라서 속세의 음식을 가지고 왔죠"
"오 좋아요~ 안 그래도 어제 허기지더라고요"
그는 내가 건넨 초콜릿을 반가워하며 받아 들었는데 어젯밤 잠자리 온돌 바닥이 꽤나 따뜻했는지 초콜릿은 모두 녹아서 흐느적거렸다.
"여기다 놓고 얼려봐요"
짝꿍은 초콜릿들을 꺼내서 돌 위에 올려놓았고 우린 해가 뜨고, 초콜릿이 얼기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비슷한 또래의 직장인이고, 혼자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며, 황금 같은 주말에 홀로 사찰을 찾아온 독특한 취향마저도..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는데 정신이 팔려 해가 떠오르는 타이밍을 못 보고 놓쳐버렸다. 이미 해는 하늘 높이 떠올라서 아쉬웠지만, 산등성이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태양은 새빨간 색깔을 띠고 있어서 그마저도 탄성을 자아냈다.
날이 밝자 오전 일정인 커플 요가 시간이 다가왔다. 어제부터 스님과, 보살님, 템플스테이 참가자들 모두, 나와 짝꿍이 커플 요가를 하길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작 우리는 별생각 없었지만 혼자 온 남녀가 커플 요가를 한다는 건 모두에게 재미있는 화젯거리였다.
이 단어만 예쁜 "커플 요가"는 앞에서 개구리 자세로 엎드려 있으면 뒤에 서있는 사람이 꼬리뼈를 발로 사정없이 눌러주는 수치 끝판왕 자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요가 덕분인 건지, 수치스러움에 얼굴로 혈액이 몰려서 혈액순환이 잘 되는 건지, 요가가 끝나고 나니 몸이 한결 가뿐해진 느낌이었다.
커플 요가 시간이 끝나고 스님과의 차담 시간이 되어 모두 옹기종기 둘러앉아 꽃차를 마시며 군고구마를 까먹었는데
진통제 두 알로 눌러놓았던 새벽부터 시작된 두통과 메스꺼움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버티고 버티다 도저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몸이 안 좋다고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식당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2시간가량이 지나자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고 있는데 지나가던 보살님이 다가오셔서 말을 거셨다.
"몸은 괜찮아요?"
"네 한결 나아졌어요, 새벽부터 두통 때문에 너무 힘드네요"
"그렇구나.. 좀 더 쉬어요, 그나저나 어제 스님께서 말씀하신 봉사활동 생각해 보셨어요?"
"아니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요"
"본인에게서 광채가 난다고 하시잖아요, 한번 해 봐요 스님께서 봉사활동 권유 아무에게나 안 해요, 분명 이유가 있어요"
그러고 보니 스님은 열 명의 템플스테이 참석자들 중에서 나에게만 권유를 하셨다. 내가 이곳과 정말 인연이 있는 걸까?
그렇게 한참을 앉아서 생각하다가 결국 이 사찰과의 인연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고 스님을 찾아가 말씀드렸다.
"저.. 봉사 활동할게요"
"그래요 잘 생각하셨어요, 다른 참석자분들은 12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신다는데, 본인은 주지스님 뵙고 차 한잔하시고 2시 케이블카 타고 내려가세요"
"네~ 그럴게요"
스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불당이 있는 방으로 돌아왔는데 또다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면서 숨쉬기가 힘든 게 아닌가?
이 방에서 잠을 자고, 요가를 하고, 차담을 할 때 계속 두통에 시달리다가 이곳을 벗어나면 나아지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면 또 미친 듯이 아파오고,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는데.. 보살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그녀는 따뜻한 차를 내어주시며 말씀하셨다.
"저도 이곳에 처음 와서 20일 동안 정말 심하게 아팠어요, 터의 기운이 세서 그래요 촉이 좋고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은 그걸 느껴요 아프다고 너무 겁먹지 말고.. 터의 기운을 이겨내야 해요"
보살님의 말씀이 사실인 건지, 타이레놀에 부루펜까지 모조리 먹어봐도 약발이 전혀 들지 않았고 통증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점점 심해졌다.
결국 나는 주지스님을 뵙지 못하고 12시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했는데, 사찰을 벗어나자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정말 사찰에는 강한 기운이 맴돌고 있는 걸까?"
"보살님 말처럼 터의 기운을 이겨낸다면 나에게 더 이로운 일인가?"
"스님께서는 왜 나에게만 봉사활동을 제안하신 걸까?"
"스님께서 말씀하신 광채는 무슨 의미였을까?"
"나는 이 사찰과 정말 인연이 있는 걸까?"
내가 너무 고통스러워해서 걱정이 되셨는지 그날 이후 사찰에서 따로 연락은 오지 않았고
내 마음속에는 수많은 물음표들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