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하고 의지하는 연습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괜찮아 그냥 가~ 어차피 둘이 있으나 혼자 있으나 똑같으니까 옆에 있으면 내가 더 신경 쓰여"
병실 안에서 간식거리를 풀어놓는 엄마를 등 떠밀어 돌려보냈다. 엄마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살피더니 진짜 괜찮겠냐고 물었지만 나 때문에 갑갑한 병실에 갇혀있는 엄마를 보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엄마가 돌아가고 난 뒤 텅 빈 병실에서 가져온 짐가지들을 뒤적여 보는데 치약/칫솔이 없다. 아마도 깜빡하신 것 같았다.
다시 병원으로 와달라고 엄마한테 부탁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차마 전화를 걸지 못하고 두 개의 링거가 어지럽게 엉켜있는 링거대를 팔에 꼽은 채 질질 끌면서 병원을 나섰다.
불행하게도 병원이 있는 건물에 편의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옆 건물까지 링거대를 끌고 걸어가야 했는데 거친 벽돌바닥 틈 사이에 바퀴가 걸려 링거대가 픽 쓰러져 버렸다.
쓰러진 링거대를 일으키려고 주저앉았는데 갑자기 기가 막힌다.
"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내 자신도 모르겠어서"
언제부터 생긴 병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 만큼 고통스럽던 위경련은 이틀 만에 나아져 퇴원할 수 있었지만 이 알 수 없는 병은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다.
"이번에 이사 가는 거 내가 도와줄까?"
"아니야! 혼자서도 금방 해"
"비 오는데 우산 가져다줄까?"
"아니야! 괜찮아 알아서 갈게"
"우리 엄마가 밥 먹고 가라고 하시는데 먹고 가"
"아니야! 나 때문에 식사 준비하시면 번거롭잖아"
이상하게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일은 어색하고 미안해서 거절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엄마에게 병원으로 다시 와달라고 전화를 거는 것보다. 길바닥에서 환자복을 입은 채로 쓰러진 링거대를 힘겹게 일으키는 일이 내겐 더 편한 것처럼
"너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방법을 몰라"
전 애인은 이런 나를 보며 마음 아파했다.
나는 언제부터 사람에게 의지하지 못하게 된 걸까?
어렴풋한 시점조차 가늠이 안 되는 걸 보면 아주 오래 전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나는 부모님께 대부분의 부탁을 하지 못했다. 집 앞 우편함에 가득 꽂혀있는 밀린 고지서들을 보면 숨이 막혀왔고 부모님께 필요하거나 가지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하는 건 나에겐 불효를 저지르는 일과도 같았다.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대학교 때까지 용돈이 없어 허덕이는 건 당연한 일상이었다.
대학 동기들이 기억하는 나는 항상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오티나 엠티에서 볼 수 없는 친구였다. 슬프게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내 인생은 마치 무더운 여름날 그늘 하나 없는 아스팔트 길에 서서 뙤약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는 것과 같았다.
남들은 시원한 그늘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때 그늘의 존재조차도 몰랐던 나는 뙤약볕 속에서 오랫동안 버텨야만 했고 당연히 열사병으로 현기증이 올 수밖에 없는데 그런 내 자신에게 나약하다며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사람에게 의지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예전엔 독립적인 내 모습이 참 좋았는데 몇 년 전부터 이런 내 자신이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찾아와 조언을 구한다. 그들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나, 혼자 남겨진 외로움에서 찾아오는 우울함을 이겨내는 방법을 묻곤 한다.
그늘의 존재조차 모르는 나는 그들에게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혼자 일어설 수 있는 힘부터 길러야 한다고 다그치곤 했다.
"나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야 건강한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어"
"외로운 감정은 오직 나 자신만이 치유할 수 있어"
"사람에게 기대하니까 자꾸 상처를 받는 거야 애초부터 기대하지 마"
.
.
.
하지만 나에게도 아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껏 팔짱을 낀 채 이런 조언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졌다.
"어리석긴! 지금은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는 타이밍이야"
"바보 아니야? 이건 당연히 혼자서 못하는 일이야"
"외로운 감정은 자연스러운 거야! 잘못된 게 아니야"
"실망해도 안 죽어! 이번에는 눈 딱 감고 그 사람에게 기대해 봐"
"부탁해도 괜찮아! 그 사람도 너를 돕고 싶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