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여름, 화장실에서 받은 침례와 수박 한 통

by 손샤인

92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요즘 말로 하면 ‘폭염주의보’쯤은 기본으로 깔고 가야 할 날들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더운 날엔 집에 있는 게 최고였고, 냉장고에 수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발걸음이 빨라졌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뭔가 이상했다.

낯선 신발들이 가지런하지도 않게 놓여 있었고, 거실 테이블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수박이 이미 먹기 좋게 잘려 있었다. 집 안은 어수선했고, 설명되지 않는 기운이 감돌았다.


“엄마?”

대답은 없었다.

이방 저 방 문을 열어보던 순간, 화장실 문이 열렸다.


언니가 나왔다.

아니, 언니와 함께 낯선 여자들이 우르르 나왔다.


언니는 흰 속치마에 흰 반팔 차림이었고, 머리칼은 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꼭 어설프게 물에 빠졌다가 겨우 살아 나온 생쥐 같았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나는 무심코, 아니 꽤 퉁명스럽게 물었다.


“언니, 뭐 하는 거야?

…그리고 누구세요?”


언니는 얼굴이 벌게져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지금 침례 받았어. 교회에서 나오신 분들이야.”


“뭐?”

순간 더위보다 화가 먼저 올라왔다.

“너 교회도 안 다니잖아. 무슨 침례야? 그것도 화장실에서?”


그때 그중 한 분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

“자매님 동생 참 예쁘게 생겼네. 언니랑 같이 침례 받아요~”


그 말이 기름이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지금 당장 나가세요. 남의 집에서 뭐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그 여름의 방문객들은 급히 쫓겨났다.


남은 건 젖은 언니와, 반쯤 비어버린 수박 접시였다.


언니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초인종이 울렸고, 문을 열었더니 좋은 말씀을 전해준다며 들어왔다고 했다. 언니는 냉장고에 있던 수박을 내왔고, 그들은 갑자기 “침례는 집에서도 받을 수 있다”며 흰옷을 입히고 욕조에 앉혀 샤워기로 머리 위에 물을 부었다고 했다. 그게 침례였단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날 가장 화가 났던 이유는 신앙도, 침례도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아끼던 수박을

그 사람들이 다 먹어치웠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다.

어쩌면 화장실에서 침례를 받았다는 것보다, 수박 한 통이 더 억울했던 어린 날의 나를.


요즘 같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들.

문을 열어주고, 낯선 이를 들이고, 아무 의심 없이 믿어버리던 시절.

그땐 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우리 집 거실까지 들어왔을까.


아마도 그 시절의 우리는

경계보다 순진함이 먼저였고,

의심보다 예의가 앞섰고,

수박 한 통이면 세상과도 나눌 수 있다고 믿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여름은,

더웠고, 어수선했고, 황당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에 와서는

웃으며 꺼내놓을 수 있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은 안다.

그날 화장실에서 언니가 받은 건 침례가 아니라

아무 의심 없이 문을 열어주던 시절의 끝이었다는 걸.


누군가의 말보다

누군가의 얼굴을 먼저 믿던 시간,

경계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쉽게 삶 안으로 들어오는지 몰랐던 나이.


그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고,

우리는 조금 더 조심스러운 어른이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출근길 나만의 일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