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수호 Jul 15. 2021

30.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가

(근간)사건 에세이 '사람이 싫다' 초고  3부 30번 에피소드

직접 다룬 사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사람을 만난다. 선한 얼굴 뒤에 감춰진 욕망을 대면한다. 모두가 잘 먹고 잘 살려는 욕심을 동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예외는 없다. 세상은 원래 그렇다. 갑자기 그렇게 된 게 아니다. 인류 역사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랬다. 그래서 별별 일이 다 생기고, 변호사는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변호사 일은 생각보다 능동적이지 않다. 박진감 넘치지도 않는다. 대부분 서류 작업이다. 재판도 시작하자마자 금방 끝난다. 지루해 보일 정도다. 영화와 드라마가 대중의 오해를 만들었다. 악당과 몸싸움 불사하는 몸짱 변호사. 도심에서 목숨 걸고 차량 추격전 벌이는 카 레이서 변호사. 담 넘고 물건 슬쩍 훔치고 함정 파서 문제 해결하는 탐정 변호사. 현실에는 없다. 업무 스트레스로 반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다.

     

변호사는 수동적이다. 누굴 만나고 어떤 사건을 맡느냐에 따라 수행하는 업무가 정해진다. 어떤 것을 얼마나 성취할지도 그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에는 우연과 운이 크게 작용한다. 찾아 나서서 인연을 만들 수도 있긴 하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운이 좋아야 한다.


악연이었던 사람이 가볍게 어떤 사람을 소개해줬는데 그 사람 사업이 크게 성공해서 주요 의뢰인이 되거나, 형편이 딱해서 손해 감수하고 수임했는데 그 의뢰인이 의외로 발이 넓어 사업가 여럿을 소개해줄 때도 있다.

     

물론 반대 경우도 많다. 큰 도움 줄 사람으로 알고 공 들였는데 나중에 보니 허당인 경우, 실력자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사기꾼인 경우. 이렇게 변호사 커리어의 성공과 실패는 내가 스스로 만들 수 없다. 남에게 달려있다. 기본적으로 변호사는 누군가로부터 사건을 받아서 처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염세적으로 보일 것 같다. 비관론, 패배주의로 오해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겪을수록 힘이 더 빠진다. 인간은 너무나 미약하고 나약한 존재다.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그렇다. 운명 앞에 무력해진다. 청담동 땅 부자 회장님 사건이다.      


회장님은 그 시절 자수성가의 표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도 못 다니며 농사일을 도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새벽에 홀로 무작정 상경했다. 배운 게 없어 몸을 혹사했다. 온갖 고생을 다 했다. 다행히 고기 장사 수완이 좋았다. 마장동에서 부를 일궈냈다. 강남 개발 초기 좋은 타이밍에 땅 사서 재산을 계속 불려 갔다. 분석과 공부가 아니었다. 돈 냄새 맡는 감각이자 본능이었다.     


부자가 된 후에는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 벌여놓은 일이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금전 관련 소송이 여러 건 있어서 재판 후 종종 식사를 같이했다. 비서에 기사까지 함께 있었지만, 점심 메뉴는 늘 청국장이었다. 기가 막히게 전국 각지 법원 앞 청국장 맛집을 꿰고 있었다. 사연이 있었다.      


한 여인을 만났다. 회장님에게는 그 여인이 ‘진정한 사랑’이었다. 청국장이 인연이 되어 만나게 됐다. 서른 살 정도 나이 차이는 전혀 걸림돌이 아니었다. 결국 살림을 합쳤다. 본처와도 자연스럽게 별거하게 됐다. 딸과도 멀어졌다. 기존 가족에게는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수백억이 왔다 갔다 하는 거대 사건이었다. 새로운 여인을 용서할 수 없었다. 돈 바라고 달라붙은 꽃뱀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사실상 이혼 상태였다. 혼인 관계는 이미 파탄됐다.     


드디어 회장님이 용기를 냈다. 더 미루지 않고 이혼과 혼인신고를 통해 법적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10년 걸린 결심이다. 꼼꼼히 상담했다. 큰 건물부터 자투리땅까지 다양한 부동산이 있었다. 준비 작업을 거치고 드디어 이혼 절차를 진행하게 됐다. 영화 ‘대부’ 속 등장인물처럼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그러자 본처도 더는 외면하지 않았다. 서류 다 만들었고 이제 다음 날 밝으면 만나서 도장 찍고 행정 절차만 밟으면 됐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럴 수가. 아니 세상에,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나. ‘진정한 사랑’의 전화였다. 울먹이는 목소리. 회장님이 급사했다.     


별일 없이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못 일어났다며 흐느꼈다. 이후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아무리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고 10년 넘게 함께 살았다 해도 법은 냉정하다. 사실혼 관계에는 상속이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은 회장님의 상속인이 아니다. 엄연히 법적으로 아직 이혼하지 않은 본처가 존재하는 중혼(重婚)적 사실혼이기 때문에 더더욱 보호받지 못한다.


비록 헤어지기로 합의했지만, 이미 10년 넘게 남남처럼 지냈지만, 그래도 엄연히 법률상 배우자는 본처였다. 법적으로 상속인은 본처와 딸. 이렇게 둘이 공동상속인이다. 혹시나 했지만 회장님이 남긴 유언도 없었다. 결국 ‘진정한 사랑’은 어떠한 법적 권리도 행사할 수 없었다. 이미 합의했다고 해서 일종의 기대권(期待權)을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 본처와 딸이 주도권을 잡았다. 치밀하고 완강했다. 주변의 조력도 완벽했다. 역시 돈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인다.     


이후 결말은 너무 씁쓸해서 자세히 적고 싶지 않다. 이런 경우 보통 빈소에서부터 소동이 벌어진다. 우리가 사는 보통의 현실은 통속극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저게 말이 되느냐고, 막장드라마라고, 시청자를 우습게 아느냐고, 저런 작가는 퇴출해야 한다고 욕하고 손가락질하게 만드는 바로 그 스토리. 그런 일들이 실제 우리 주변 현실에서도 벌어진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회장님이 조금만 결심을 빨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조금 더 떼 주더라도 본처와 일찍 합의했다면 어땠을까. 억지로라도 생전에 큰 재산 넘겨줬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가정은 의미 없다. 인간이 스스로 운명을 이겨내고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그렇게 답하지 못하겠다. 우리는 그저 운명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갈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27. '명함왕' 김춘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