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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수호 Jul 13. 2021

27. '명함왕' 김춘삼

(근간)사건 에세이 '사람이 싫다' 초고  3부 27번 에피소드

너무 무거운 이야기만 한 것 같다. 모든 사건이 다 묵직하진 않다. 헛웃음 나오는 일도 많고, 황당한 일도 자주 벌어진다. 특히 사기 사건이 그렇다. 에피소드도 많다. 사기꾼들은 다른 사람 속여서 편하게 먹고산다. 그런 놈들이 길바닥에 널려 있다. 테헤란로 걸어 다니는 사람 절반은 사기꾼이다.

 

그들은 땀 흘려 일하지 않는다. 생산 활동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다. 땀 흘려 노동하는 사람을 한심하게 바라본다. 전 국민이 먹잇감이다. 폭력 범죄보다 질 나쁜 사기 사건이 많다. 이익이 있는 곳에 손해도 있다. 누군가 웃으면 누군가는 눈물 흘린다. 그래서 황당 사기 사건을 다룰 때도 결국 진지해진다.


사람이 싫다.





사기꾼들은 깔끔한 옷과 세련된 언변. 그리고 고급 승용차와 잘 꾸민 사무실을 앞세워 피해자를 현혹한다. 화려한 인맥도 빠질 수 없다. 정치인, 연예인, 스포츠 스타 등 유명인과 찍은 사진이 사기에 적극 활용된다. 사람들은 잘 나가는 사람에게 약하다. 인간의 한계다. 그래서 재력과 인맥 과시는 ‘허영심 이용형’ 사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반대로 ‘동정심 유발형’ 사기꾼도 있다. 차비가 없어요, 지갑 분실했어요, 길 잃어버렸어요, 집에서 쫓겨났어요 등등 고전적 수법이 지금도 통한다. 하지만 피해 규모와 충격은 허영심 이용 사기가 압도적으로 크다. 이들은 인맥을 과시해서 피해자를 속이기 위해 사진과 함께 명함도 이용한다. 그동안 만난 명함왕이 여럿이다.



   

한 연예인이 40대 부동산 업자를 소개해줬다. 짧은 회의 마치고 헤어졌는데, 갑자기 카톡이 줄줄이 오기 시작했다.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을 알고 있는지 보여주겠다며, 명함을 촬영한 사진 수백 장을 하나씩 카톡으로 보내왔다.


모아서 한 번에 보낸 것도 아니고 그 많은 걸 일일이 한 장씩 보냈다. 사진이 깔끔하지도 않았다. 여백은 삐뚤빼뚤, 각도도 제각각. 마음대로 찍었다. 일종의 기이함을 느꼈다. 정상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얼마 후 감옥에 갔다. 부동산 강의도 하고 방송에도 나왔지만 본질은 역시 사기꾼이었다.




더 강렬한 기억은 따로 있다. 중절모 쓰고 멋진 반백의 턱수염을 자랑하던 부동산 분야 사기꾼 할아버지였다.


독특한 전문 분야를 가진 사람이었다. 건축 도중 문제 생겨서 올라가다 중간에 멈춰버린 건물이 꽤 많고 대체로 도시의 흉물로 남는다. 공사 중단 이유는 다양한데, 결국 인허가 그리고 돈 문제다. 할아버지는 그런 문제를 해결해주고 돈 받는 해결사이자 브로커였다. 여러 건 가운데 하나만 풀어도 큰돈 벌 수 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직업이 있다.     


할아버지는 마주 앉자마자 장황하게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말을 이어 나가면서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유명한 사람들의 명함을 가방에서 한 장 한 장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보석상이 흰 장갑 끼고 보석 꺼내 보여주듯 조심스럽게 다뤘다. 그동안 수많은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이렇게 보여줬을 거다. 얼마나 많이 꺼냈으면 명함 귀퉁이가 다 닳아 둥그렇게 돼 있었다. 색도 군데군데 바랬다. 언제 적 명함인지 궁금했다.     


명함 속 이름이 신기하기는 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 사람들의 활동 분야, 소속, 나이 등 맥락이 없어서 의아했지만, 그거야 뭐 할아버지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한참을 자기 인맥 과시하면서 신뢰감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명함 진열은 너무 옛날 방식이었다. 진짜 명함인지도 모르겠고, 진짜라 하더라도 입수 경위가 다양할 수 있다. 속고 싶어도 속기 힘들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나중에 업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황당하고 씁쓸했다. 할아버지는 집이 없어서 찜질방에서 기거했다. 돈 한 푼 없었다. 심지어 세탁소에서 옷을 빌려 입고 다녔다. 만수 아빠 최주봉의 ‘한 지붕 세 가족’이나 최민식과 한석규가 함께 나온 ‘서울의 달’에서나 보던 일이 21세기에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주변 건설업자에게 밥값, 소줏값, 담뱃값 소소하게 몇 만 원씩 빌려 썼다. 물론 안 갚았다. 또는 다른 업자에게 빌려서 돌려 막았다. 이제 업자들 사이에 다 소문났다. 하지만 조금 맹하거나 욕심에 눈먼 업자들은 할아버지에게 사업추진비를 뜯겼다. 어어 하는 사이에 수백만, 수천만 원 물린 사람도 있었다.       


얼마 후 할아버지가 다시 찾아왔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걸 할아버지는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알았다면 다시 오기는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허풍에 넘어가지 않자 할아버지는 방향을 급히 바꿨다. 갑작스레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게 대신 전화 한 통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놀랍게도 딸 전화번호였다. 나이도 나와 비슷했다. 자기가 잘 지낸다고 한마디만 전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왜 직접 걸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슬픈 눈빛으로 딸이 자기 전화 안 받은 지 벌써 몇 년 지났다고 답했다.     


의아해하는 내게 할아버지는 그동안의 일을 한참 동안 털어놨다. 듣고 나니 딸이 왜 그러는지 백번 이해됐다. 나이 먹었다고 다 어른은 아니었다. 아버지 때문에 딸도 신용불량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미 억대 빚을 지고 있었다. 딸은 내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 잘 있다며 이야기 꺼내자마자 그냥 끊어버렸다. 이런 전화 부탁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았다.     


고백해야겠다. 나도 밥값, 교통비 몇 번 빌려주고 못 받았다. 다 합하면 30만 원 정도 될 거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주 저렴한 실무 경험 수업료로 생각할 수 있다. 제대로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여러분도 개발업자나 브로커 절대 믿지 마시라. 가장 허접한 업자라도 적어도 여러분보다는 교활하고 간사하고 몰염치하다. 어울리면 언젠가 털린다. 피할 수 없다.


사람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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