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두는 사람들
외로움은 나쁜 것이 아니라 말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느끼는 외로움의 단점은 ‘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중화요리를 하는 삼촌을 둔 친구가 있었다. 학교 뒷문에서 20분쯤 걸어가면, 주공 아파트 단지 안 상가 2층에 서 ‘주공반점’ 이라는 중국집을 운영하고 계셨다. 학교 점심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친구들과 함께 쪼르르 달려가서 짬뽕이나 짜 장면을 시켜 먹곤 했다. 그 당시 삼촌은 등치가 아주 좋았고 인상이 무서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과거 어두운 주먹세계에 잠시 발을 담근 적이 있었다고 했 다. 뭐 어린 우리에게 농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 어둠 의 세계 이야기는 호기심이 가득하던 우리를 홀리고, 삼촌을 영웅 화하기에 충분했다. 간혹 우리가 놀러 갈 때면 삼촌은 옛날이야기 를 해주셨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조직에 들어간 지 얼마 되 지 않아 다른 조직원과 술집에서 싸움이 일어났다고 했다. 하지만 상대 숫자가 너무 많아 삼촌은 이러다 맞아 죽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부터 살고 보자 도망가려 했단다. 그때 연락을 받고 나타 난 삼촌이 속해 있는 조직에 두목이 발차기로 두세 명을 순식간에 때려눕히고, 나머지 놈들을 눈빛으로(!) 제압했다는 것이다. “그 때 그 두목이 바로 너희들이 아는 OOO야!” 듣는 우리는 소름이 끼 치고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그런데 그 이야기도 갈 때마다 듣다 보니, 나중에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왔다. 중국집은 비가 오는 날이면 사람들이 밖에 나가 외식을 하지 않고 집에서 시켜먹기 때문에 더 바쁘다. 그날 ‘주공반점’은 궂은 날씨 때문에 평상시보다 더욱 분주했다. 친 구는 우리에게 삼촌 가게가 너무 바빠서 그런데 주방에서 양파를 까거나 홀에 서빙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나와 친구는 용돈을 준 다는 말에 신이 나서 달려갔었다. 일은 정신없이 바빴고 교복을 입 은 우리가 주방에서 양파를 까고 서빙을 하고 있으니 손님들도 신 기해했다.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 마감 시간이 되었고, 삼촌은 우 리에게 술을 마실 줄 아느냐고 물었다.
학생 때 마신 술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목이 따가운 정도로 썼 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피워본 담배도 그렇고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어른들의 세계는 쓴맛이었다. 삼촌은 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이게 달게 느껴지는 순간 너희는 어른의 무게를 알게 될 거야”라 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허세 가득한 멘트였지만, 그때는 그 120 121 게 또 멋져 보였다.
삼촌은 어릴 적 친구들을 소중히 여기라고 했다. 나이를 먹으면 ‘내 별거 아닌 뻘소리’를 들어줄 친구가 줄어든다며, 그런 친구들은 내가 붙잡으려 해도 각각의 이유로 주변에서 떠나간다고 했다. 예전에 삼촌은 친구와 밤새 두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 다고 했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와 ‘지구는 사각형이다. 아니다. 지구는 둥글다’를 가지고 밤을 꼴딱 새우며 해가 뜰 때까지 이야기 했단다. 그때 나도 어른이 되면 언젠가는 고독에 찬 남자의 넋두리 로 밤을 새워보겠다 다짐을 했었다
15년 정도가 흘러 이제 내가 삼촌 나이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 업하고 한 번쯤 찾아가려 했는데, 그전에 폐업하고 대전 어딘가에 서 다른 일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다. 지금 내 주변엔 삼촌이 말 한 대로 ‘지구가 둥근지’ ‘신은 정말 있는지’ 영양가 없는 시시콜콜한 농담을 들어줄 친구들이 몇 남지 않았다. 얼마 전 친구를 만나 “야 나 성욕이 없다. 남자 성욕이 1%만 줄었어도 지구의 인간은 종말 했을 거라던데”라는 이야기로 한참을 떠들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도 분명 중요하지만, 그들에게는 내 성욕 에 관한 말을 할 수는 없다. 반말보다는 존댓말이 편한 사이도 마 찬가지다. 분명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는 가벼워 보이 지만, 실상 가장 단단한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이제 그런 친구 가 줄어든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까지 숨기고 싶은 비밀 아닌 비밀 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