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두는 사람들
금요일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딱히 야근이 없던 회사라 서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오빠, 퇴근 아직 안 했지?”
“어~ 아직”
“나 지금 오빠 회사 앞이야. 시간 되면 빨리 나와”
“진짜?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빨리 오기나 해”
우리는 소개팅으로 신논현역 근처 식당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처음 만났었다. 나는 논현역, 그 친구는 강남역 근처에 직장이 있 어서 딱 중간인 신논현역에서 처음 만남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인 연이 되어 쭉 이어온 것이다. 당시 우리는 전에 사귀던 사람과 헤 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피차일반 말은 안 했지만, 연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가능했 지 싶다. 그래서 저녁 시간도 아까워 점심때 본 것이고, 신기하게 도 그런 우리가 연인이 되었다.
나보다 삼십 분 일찍 퇴근한 여자친구는 커다란 가방과 캐리어 를 끌고는 논현역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난 “무슨 짐이 이렇 게 많아? 그 캐리어는 왜 끌고 왔어?”라며 물었는데, 일단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자며 날 끌고 지하도로 내려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여자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오빠, 내가 지금 도쿄 가자고 하면 어쩔 거야?”
“라멘집 가자고?”
“아니, 일본 도쿄!”
“일본? 지금? 비행기 타고?”
“어! 내가 오빠 옷이랑 비행기 표랑 숙소까지 다 준비했다 치 면?”
“장난해? 갑자기 무슨 일본이야! 내 옷은?”
“장난 아니고 진심이야, 그리고 오빠 옷 다 챙겨왔어.”
“너 미쳤어? 속옷도?”
“어. 나 미친 여자야”
그렇게 당일 밤 비행기를 타고 일본을 갔다. 넥타이를 차고, 구 두를 신고, 사원증도 목에 건 체 비행기를 탈 거라곤 생각도 못 했 다. 어쩐지 인천공항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계속 위치를 물어보던 이유가 있었다. 여자친구가 2주 전부터 주말에 데이트할 거니까 무조건 시간을 비워두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렇듯 그녀는 늘 에너지가 넘치는 친구였다. 하고 싶은 것도 많 172 173 고, 꿈이 많은 아이였다. 그에 비하면 난 늘 조용하고 잔잔한 호수 같은 남자친구가 아니었나 싶다. 항상 그 친구는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 나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럼 난 ‘그건 좋겠다.’ 또는 ‘그건 좀 무리지 않을까?’라고 조언 아닌 조언을 해주는 사이.
여자친구는 아빠 같은 든든한 남자가 좋아서 늘 나이 차이가 있 는 연상을 만나왔단다. 동갑은 철이 없어서 한심해 보인다나? 아 무튼, 그 친구에겐 나에 대한 그런 환상이 있었다. 자신보다 어른 스러운 존재. 하지만, 사랑에는 바라는 것이 없어야 온전한 관계 가 유지된다는 말처럼, 바라는 것이 확실했던 우리 사이는 삐걱거 리기 시작했다.
많은 연인은 각자 배역을 맡고 있다. 이상형이란 핑계로, 상대가 내가 원하는 이상이 되어주길 바란다. 작게는 옷 입는 취향에서부 터 크게는 성격이나 직업까지. 사람은 어떻게 보면 참 이기적인 존 재다. 자식에게 자신의 꿈을 심는 부모처럼. 결국, 내가 원하는 걸 얻고야 마는 욕심 많은 존재이다. 나 또한 그렇다. 너의 어떤 모습 이든 사랑하겠다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라고 말해 놓고는, 정작 그렇게 사는 것을 나중에는 한심해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빨리 깨달아야 한다. 실패 한 사랑에서, 또는 멀어진 인간관계에서, 내 본심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가 던져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마도 종말이 예견된 만남을 또 반복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