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평
뇌혈관 질환 가족력이 있고 어릴 때부터 만성적으로 편두통을 앓았기 때문에 뇌졸중과 관련된 콘텐츠가 있으면 관심을 갖고 보는 편입니다. 최근 트위터에서 뇌졸중 진단법이 화제가 되는 것을 보고 새삼스럽게 몇 가지 지침을 외워놓기도 했고요.
웃어 보라고 했더니 얼굴의 양쪽이 대칭을 이루지 않아 한쪽 입꼬리가 흘러내리는 듯하고, 팔에 힘이 없어지며, 말하는 것이 어눌하면 얼른 119에 전화해야 한다고 합니다. 뭘 외울 때 두문자를 사용하는 건 만국 공통이네요.
어쨌든 Stroke meme은 메디컬 드라마 몇 편만 보면 꼭 나오기 때문에 저는 예전부터 이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나에게는 저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잘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감은 질 볼트 테일러의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를 읽고 산산히... 부서졌습니다...
의학박사 테일러는 어느 날 아침, 자신에게 증상이 발생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 증상이 뇌졸중 증상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FAST 중 A를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오른쪽 팔이 마비되어 옆으로 풀썩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즉시 119에 전화를 하거나 직장(이 의과대학이니까요)에 전화를 걸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합니다. 대신 그가 한 생각을 몇 가지 나열하면
- 침대에 다시 눕고 싶다.
-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지금 뭐 하려고 했더라? 아, 도움을 청하려고 했지! 라는 생각을 반복하기
- 1,600킬로미터 멀리 떨어져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하려고 하기
- 직장 전화번호를 떠올리려고 애쓰기
- 1과 10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고민하기
- 45분동안 '누구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하기
- 주치의에게 전화해서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상대의 말("마운트 오번 병원으로 와요")를 못 알아듣기
테일러는 도움을 요청하는 데 성공했을까요? 아무래도 성공했으니까 위와 같은 책을 썼겠죠. 그리고 그는 재활에 성공했을까요? 역시 재활에 성공했으니까 책을 썼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어쨌든 저는 깨달은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뇌졸중에 걸리면 119에 전화를 할 수 없을 수도 있겠구나!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포스트 닥터 과정을 밟고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신경과학을 강의하던 대학 교수가, 뇌졸중을 겪고 난 뒤에는 3세 유아들이 가지고 노는 블럭을 맞추지도 못하고, 구구단을 외우지 못할 수도 있구나! 그리고 이 두껍지 않은 책의 책장을 덮고 난 뒤(전자책이므로 두껍지도 않고, 실제로 책장을 덮지는 못합니다)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이 책을 읽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뇌졸중에 걸렸는데, 이전처럼 회복할 필요성을 못 느끼면 어떻게 하지?'
(위의 FAST 규칙과 별개로 미국에는 '탄 토스트 냄새가 나는 것이 뇌출혈의 증상이다'라는 밈이 있는 것 같은데,
검색해보니, 뇌경색 증상을 그 원인에 따라 다섯 가지로 분류할 때 쓰는 분류법을 TOAST classification이라고 부른다는 것까지는 찾았어요. 실제로 탄 토스트 냄새를 맡는 것이 어떤 질환의 증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