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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제로 Jan 13. 2020

약을 안 먹는 것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딸 수 있다?

<홈랜드>와 <스핀 아웃> 속 '조증' 판타지


드라마 <스핀 아웃>은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2020년 신작으로, 영화 <메이즈 러너>와 <캐리비안의 해적>을 통해 얼굴을 알린 배우 카야 스코델라리오가 피겨 스케이터 '캣 베이커' 역할을 맡은 사이코(광인이 폭주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스릴러(누가 죽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입니다. 현재 1시즌, 10개의 에피소드가 공개되어 있죠. 스토리의 진행을 쫓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보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보면서 '저 상황에서 저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다' 등의 대화를 나누어도 좋을 작품입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지난 주말을 이용해서 사흘에 걸쳐 보았는데, 주인공인 캣 베이커를 비롯하여 캣의 어머니와 여동생, 캣의 코치 등 여성들이 주도하여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작품이어서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올림픽 출전을 위한 스케이터들의 고군분투도 볼만 합니다. 자꾸 김연아가 생각나고 아사다 마오도 생각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위에서 이 작품을 '사이코 스릴러 드라마'로 정의한 이유는, 이 작품이 인물들의 감정 묘사에 많은 공을 들인 드라마여서이기도 하지만 캣 베이커가 정신질환(모친에게 물려받은)을 앓고 있다는 설정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극중에는 그때그때 '조울증' 혹은 '조증'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되는데요, 캣과 그의 어머니가 겪는 조증 삽화를 보면 그들은 1형 양극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주인공이 양극성장애를 갖고 있는 유명한 드라마가 또 있습니다. '캐리 매티슨'이 주인공인 <홈랜드>가 그것입니다. 캐리 매티슨이 겪는 조증 삽화는 캣이 겪는 것과 그 양상이 약간 다른데, 이는 아마 2형 양극성 장애를 묘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캐리 매티슨은 CIA 요원입니다. 캣 베이커의 목표가 올림픽 금메달이라면, 캐리 매티슨의 목표는 미국을 지키는 것입니다. 즉 두 사람은 보통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스트레스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부모로부터(캣은 어머니로부터, 캐리는 아버지로부터) 병을 물려받았다는 공통된 설정을 가지고 있는데, 정신 질환의 발병에는 유전적 요인뿐만 아니라 스트레스와 같은 환경적 요인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현실의 많은 사람들은 특정 질환의 가족력을 보유하고 있으면 발병 요인에 노출되는 것을 제한하는 삶을 삽니다. 캣과 캐리는 짚을 짊어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드라마 주인공이 되었겠지만요.


이들은 특별한 임무 수행을 앞두고 단약을 결정하는 실수를 한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습니다. 캣은 조증 삽화를 겪는 상태를 정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고, 약물로 잘 조절되어 있는 상태를 비정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을 안 먹으면 하루에 1시간만 자도 쌩쌩하고, 바깥일과 집안일 모두 거뜬히 해낼 수 있다. 그런데 약을 먹으면 물 속을 걷는 느낌이 들고 언제나 피곤하다'는 식의 말을 합니다. 캐리는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는 능력은 갖고 있으나, 조증 삽화를 의도적으로 일으켜 그 상태를 자신의 임무에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스핀 아웃>과 <홈랜드>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일부러 조증 발작을 유도하여 그 시기의 폭발하는 에너지를 이용해 올림픽 금메달을 따거나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막는다는 설정이 가능한 것입니다. 실제로 조증 삽화 시기에 많은 사람들은 빈 속에 커피 17잔(<스핀 아웃>에 등장한 숫자입니다)을 마신 기분으로 신용카드를 긁으며 돌아다닙니다. 그 당시에는 해당 물건을 구입하는 행동이 최선의 행동 같고, 매달 얼마쯤의 할부금은 쉽게 갚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 고지서를 처리해야 하는 것은 삽화가 끝난 뒤의 자기 자신입니다.


극중의 캣은 리튬을 복용하며, 캐리는 클로자핀을 복용합니다. 약을 먹으면 피곤하다는 둥, 생각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둥 하지만 약을 통해 잘 조절되고 있는 시기의 캣과 캐리도 충분히 사회적인 기능을 잘 하고 있습니다. 현실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그 정도로 기능을 하면 충분합니다. 그 이상의 극적인 기능(혼자서 미국을 구하거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거나)을 하기 위해서 단약을 해야겠다는 결심 자체가 양극성장애의 증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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