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목표가 아니었다. 덜 흔들려도 되는 삶에 대하여
"행복엔 돈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거짓 행복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고 있는가."
표지의 그 문장에 끌려 책을 집었다.
'행복을 헷갈려 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유익이 있을까.'
이런 심정으로 말이다.
러셀은 처음부터
행복을 감정이 아니라
삶의 구조 문제로 다룬다.
기분이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루를 영위하는가에 초점을 둔다.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행복한 삶은
대체로 조용한 생활이어야 한다.
참된 환희는 오직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p.68)."
여기서 말하는 조용함은
성격이나 취향이 아니다.
말 그대로
물리적인 소음이 적은 삶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외부 자극에 끌려다니지 않는 삶.
즉,
그런 자극에 반응하지 않아도 되는
여백이 확보된 삶에 가깝다.
러셀은 행복이
자아와 자극에 대한 집착에서 멀어지는만큼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예로,
현대인은 피로하다.
피로의 원인은 대체로
자극에 대한 집착에 있다.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한계를 넘는 자극에의 욕구는
왜곡된 성격이나
본능적인 불만족의 조짐이다(p.79)."
우리는 흔히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어서 피곤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러셀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고
자극에 반응하는 상태 자체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구조,
그것이 불행을 고착시키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불행엔 여러 요인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질투는 적은 비중이 아니다.
러셀은 현대를 질투가 특히 만연한 시대로 본다.
"질투의 결과로 생기는 정의는
자칫하면 최악의 정의,
즉 불행한 사람들의 기쁨을
증가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행복한 사람들의 기쁨을
감소시키는 정의가 되기 쉽다(p.91)."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타인을 끌어내리는 물귀신 심리다.
모두를 더 나아지게 하기보다는,
다 같이 낮아지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정의.
러셀은 이런 질투에 의한 정의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본다.
인간은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불안은 증폭된다.
불안은 피로, 질투, 죄의식,
피해망상으로 이어진다.
"문명인은
자아를 초월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자아를 초월함으로써
우주의 자유를 획득하는 법 또한
배워야 한다(p.94)."
행복은 자아를 키우는 데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자아와의 거리를 조절할 때,
삶은 그만큼 가벼워진다.
그렇다면
자아에 대한 집착을 줄인
사람들의 사랑은 어떨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행복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랑에 대하여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받는다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받는 사랑은 주는 사랑을 해방시켜야 하며,
두 가지 사랑이 같은 정도로 존재하는 경우에
사랑은 그 최대의 가능성을 달성한다(p.178)."
사랑이라고 별 다를 게 없다.
사랑 역시
주고 받음의 균형이
관계를 지탱한다.
한쪽은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
다른 한쪽은 일방적으로 받는 사랑,
그런 것은 지속불가능하다.
부모와 자식 관계라 하더라도
그런 구조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어느 한쪽은 버티느라 소진되고,
소진되기에 무사할 수 없다.
러셀은 이렇게까지 말한다.
"오늘날(1930년)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열에 아홉은 그들 모두에게,
아니면 적어도 그중 어느 한쪽에게 불행의 원천이 된다(p.180)."
"양심적인 어머니들은 자녀에게 너무 적게 요구하고,
비양심적인 어머니들은 너무 많이 요구한다(p.187)."
극단만 있고,
정작 필요한 중용이 없다는 것이다.
선의로 포장한 극단으로는
관계가 건강해지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그러한데,
타자와의 관계는 어떻겠는가.
러셀은 타자를 도구로 대하는
서구 문명 자체를 바라본다.
"확실히 백인종이 세운 문명은
남자나 여자나 이 문명을 흡수할수록
불임이 된다는 이상한 특성이 있다.
현재는 서방의 가장 지성적인 계층이
절멸해가는 중이다(p.188)."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소름이 돋았다.
생산력은 증가했지만
생명력은 줄어드는 구조.
이건 21세기 현 시점의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북미, 유럽 주요국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 지역의 공통점 중 하나는
서구문명 동화율이 높다는 것이다.
그런 예지의 말을 하면서도
러셀은 비관하지 않았다.
살아있고 탐구하고 창조한다면
그 자체로 삶이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와 위대한 과학자가 하는 일은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p.207)."
그리고 책 말미에,
철학자인 러셀은 의외로
영성적인 메시지로 마무리한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우주의 시민이라고 느끼며,
죽음을 생각할 때에도
크게 괴로워하지 않는다.
생명의 흐름과
본능적으로 깊이 결합될 때,
우리는 가장 큰 환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p.239)."
그는 생명의 흐름을 따르라고 말한다.
행복은 목표가 아니었다.
도달해야 할 상태도 아니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다시 읽으며 더 와닿은 것은
‘행복해져야 한다’는 압박이 아니라
‘덜 흔들려도 된다’는 감각이었다.
조금 덜 자극받고,
조금 덜 비교하고,
조금 덜 집착하면서도
살아 있는 흐름에 정직하게 참여하는 삶.
행복은 고집 끝에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흐름 속에서
뒤늦게 따라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26년 1월 21일
Son the writer(aka 엠마네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