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계산이 되는 순간

갑과 을의 연애, 먼저 좋아하면 지는 게임

by Son the writer

2000년대 초반 어느 포털 상담 게시판에서

대략 이런 내용의 게시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갑의 연애.png


“평소 제가 좋아하던 남자애가

제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어요.


그래서 고민하고 있어요.


이제 제가 갑이잖아요.


제게 권력이 생겼으니

어떻게 어디까지 해야 갑의 위치를

잘 누릴 수 있을지 조언을 해주세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


네…?

갑?

권력?


게시글을 올린 20대 여성은

초보 갑으로서

을에 대한 권력을

어디까지 행사해야 할지

진지하게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 게시글이 특별했던 이유는

단순히 한 사람이 계산적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글에는 이미

관계를 권력의 언어로 이해하는 감각

또렷이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은

현 시점에 이르러 그 권력 감각이

더 이상 어느 한쪽만의 것이

아니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자들도 이미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좋아하는 쪽이 진 거야.”

“네가 나 좋다고 먼저 고백했잖아.”



오늘의 연애_권력.jpg 영화 <오늘의 연애>, 2015


남녀 모두 이성 교제를

먼저 좋아하고 고백한 쪽이 지는 게임으로

또렷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고백받은 쪽은

갑의 위치를 계산하고 있었고


고백한 쪽은

이미 을이 되는 입장에서

어떻게 비위를 맞춰야 할지를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관계에 권력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가 그 권력을 또렷하게 인식하는 순간

관계의 성격은 달라집니다.


감정의 주고받기 영역이던 관계가

승패 전략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특히 남녀 모두 이성 교제를 사랑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한 변화는

2010년대에 들어서며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 변화는 SNS의 발흥과 맞물려 있습니다.



인스타그램.jpg 인스타그램, 청년들의 사고를 이전과 아예 다르게 변화시킨 주역 중 하나이다.



그 순간, 사회와 개인은 임계점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권력을 갖고 상대방을 지배해야 돼."




이후 남녀 관계를 가만히 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자주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성적 끌림, 호감을

사랑의 감정 표현으로 말하면서도

머릿속은 권력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좋아하는지

누가 더 먼저 연락하는지

누가 더 바치는 노력을 하는지


관계는 그런 순간마다 저울 위에 올라갔고,

다툼이 늘어났습니다.


꺼내놓은 말은

사랑이나 감정이나 손익이었지만,

이면에서는 모두 주도권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주도권 계산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억울해.”


이 말은 사실 꽤 자본주의 사회 개인의 감정입니다




갑의 위치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권력만 행사하고 싶고 손해는 보기 싫다.

나는 누리기만 하는 소비자이고 싶을 뿐이다.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감정 노동? 그건 너나 해.'


다른 한 쪽인 을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입니다.


'내가 이만큼 너에게 헌신으로 투자했는데

네가 나에게 줄 배당 이익은 뭔데?

나는 투자자야.

투자자는 큰 배당 이익을 원하지.'


그 순간,

권력 투쟁의 손익 계산이 사랑의 마음을 밀어내고

관계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원래, 대칭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영화_사랑은 은반 위에_1992.jpg 영화 <사랑은 은반 위에>, 1992 티격태객 속에서도 협력 케미를 이룬 남녀 이야기.


어떤 날은 이쪽 사람이 더 사랑하고

어떤 날은 다른 쪽 사람이 더 버팁니다.


어떤 시기에는 어느 한쪽 사람이

관계를 더 오래 지탱하는 부담을 지기도 합니다.


이런 비대칭은 사실 관계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누구와 만나서 사귀더라도

관계의 비대칭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비대칭의 발생을

어느 순간부터 불공정으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관계에서는

이런 실화 사례도 자주 등장합니다.




“제가 너무 잘해주면 안 될 것 같아요.

제가 먼저 연락하면 지는 거잖아요.


이성적 끌림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제가 호감을 먼저 표현해서 손해 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 이성적 끌림이 있는 사람이

당신에게 호감을 표현해야 응해주겠다는 거군요?"


"그런 셈이죠."


"그럼, 그 사람이 당신에게 고백할 일이 있을까요?"


"모르죠. 적어도 손해는 안 보잖아요."




사람들은 점점 감정을 잘 표현하는 법보다

관계에서 손해보지 않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예로,

연애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나

나르시스트를 구별하는 방법 영상이 인기를 끌고,


모텔연쇄살인범 김소영.jpg 서울북부지검이 2026년 3월 9일 공개한 '강북 모텔 약물 연쇄살인' 피의자 김소영. 좌는 인스타그램 얼굴, 우는 공개된 얼굴.


소시오나 사이코의 극단적인 소수 범죄 사례를

상대방 성별로 일반화해서 편견을 갖고

두려움에 떨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은

손해 보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이뤄집니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 속에서도 사랑은 신비합니다.


사귀는 남녀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사귀게 되는 순간부터 갑을 관계가 펼쳐집니다.


이제부터는 누가 더 좋아하는지,

누가 더 끌려다니는지, 누가 관계의 주도권을 쥐는지,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가 됩니다.




이런 현실 속에

많은 남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저를 위해 헌신해주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저를 최우선 순위로 두는 사람이 좋아요.”


그들의 말에 담긴 심정은

누구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빠져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남녀 비대칭.jpg


사랑 받고 싶어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본질은 주는 것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반면 보답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줘봤자 보답이 돌아올 확률은 희미하다.'


오늘날 우리는 사랑을 받고 싶어하지만,

그 어느 시대와 비교하더라도

사랑을 주는 것을 불안해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사랑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사랑이 시작되나요?"




요즘 청년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IMF 이전까지의 한국 사회는

사랑과 낭만이 살아 있었습니다.


좀 많이 과도하게 말이에요.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로얄디.jpg 동아제약 건강 음료 <로얄디> 광고, 1991. 카피 문구가 크게 유행했었다.


"내 그대에게 밤하늘의 별도 따 주리."


정말 그랬다니까요.

낭만의 패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의심 가면 부모님이나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세요.

손으로 쓴 연애 편지들과 낭만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심지어,

가까운 조상님 세대로 가면 이래요.


이수일과 심순애_1965.jpg 이수일과 심순애(1965), 감독 김달웅, 주연 신성일, 김지미, 허장강


이수일과 심순애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심순애가 배신합니다.

그녀는 부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매혹되었던 거죠.


순정을 바쳤던 청년 이수일은 돈에 원한이 생겨

냉혹한 고리대금업자가 됩니다.


그후 몇년의 세월이 지나,

심순애의 결혼생활은 파탄이 납니다.


좌절한 심순애는 대동강 투신 자살을 시도하지만

다행히 이수일 친구에 의해 구조됩니다.


그러나 심순애는 놓친 사랑에 대한 미련으로

정신질환이 오고 맙니다.


비슷한 시기 이수일은 번아웃이 와서 휴양 중,

사랑의 시련으로 동반자살하려던 남녀를 구출하면서

마음에 변화가 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했던 자신을 떠올린 겁니다.


친구는 그런 둘을 보고 다시 재회의 다리를 놓습니다.

둘은 다시 맺어져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라는 말은

수없이 반복됩니다.


사랑은 헌신, 심지어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희한하게도

사랑을 받는 사람의 의무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회와 매스컴은 개인에게

'사랑을 먼저 주라'는

메시지 버튼만 계속 누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해가 됩니다.


사랑을 먼저 줘야 사랑이 시작되니까요.


그러나 시작되면 뭐합니까.

사랑이 잘 유지되면서 관계가 성숙해져야 하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의무가 있음을 봅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


최우선으로 할 일은,


받았던 사랑을 명분으로

권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은

관계에서 아주 강한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힘으로 상대를 조종하거나

착취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을 받는 사람의 첫 번째 윤리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이런 일이 생깁니다.


갑을의 연애.jpg


한 사람은 사랑을 받기만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랑을 주기만 합니다.


이 경우는

상대의 헌신을 요구하고 받아서 누리지만,

자신의 헌신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는 균형이 이미 한쪽으로 쏠렸습니다.

오래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관계가 오래 유지되기 위해,

사랑의 헌신 분량(?)이 완전히 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기본으로, 서로에게 헌신할 의지를 표현하고

작더라도 보답이 있으면 관계는 오래 유지됩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안하고 단지 받기만 하면서

오랜 세월 관계를 유지하겠다?


그것은 그 누구라도 불가능합니다.


최소한의 보답마저 없이 그게 가능한 경우는 없습니다.




남녀 모두 관계를 주도권 계산으로 여기면

다음과 같은 일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상대를 사랑하기보다

자신이 손해 보고 있지 않은지를

최우선으로 확인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관계의 가치 중심은 바뀝니다.

사랑이 아니라 공정성이 중심이 됩니다.


이제 새로운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요즘 이렇게 생각합니다.


“공정한 관계가 좋은 관계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말씀드렸다시피,

누구와 만나 교제해도 불균형은 발생합니다.


이런 불균형때문에 사랑을 받는 쪽은

관계의 균형을 회복할 의무가 생깁니다.


사랑은 원래 불균형하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꺼이 더 주는 감정과 행위입니다.


그런데 관계를 공정성의 저울 위에 올려놓는 순간,

주는 쪽과 받는 쪽의 여러 감정과 언행은 계산 항목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질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정한 관계는 정말 좋은 관계일까요.


아니면 우리는 지금

오히려 사랑의 마음을 착착 조금씩 지워가고 있는 걸까요.




다음 화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생각 하나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공정한 관계라는 믿음.”


어쩌면 그것은

현대 사회가 만들어 낸

가장 매력적이면서

가장 파멸적인 믿음일지도 모릅니다.


- 계속


2025년 11월 14일 초안 작성

숙고 및 퇴고 후,

2026년 3월 12일 업로드

Son the writer (aka 엠마네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