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의 독서 끝에서, 읽는다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건 만 나이로 일곱 살 무렵이었다.
어릴 적 별명이 ‘책벌레’였다는 사실이 아직도 기억난다.
어린이 동화책에서 출발해 수십 년 동안 독서를 이어왔다.
한 달에 적게는 다섯 권에서 여섯 권,
평균적으로는 열다섯 권, 많을 때는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합산해 보면 4~5천 권을 읽었을 것이다.
이런 내 독서량은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면 많이 읽은 것이지,
전문 지식인이나 출판인들의 경우
1만 권 이상 읽은 사람들이 즐비하기에 자랑할 만한 게 못 된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저녁 이후 책을 읽었다.
그건 생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독서의 최대치였다.
어쨌든 내가 읽은 책들 중에서 양서를 고르라고 하면,
대략 200여권 정도로 수렴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양서들 중에서도 내 사유와 태도로 체화되어
내 삶에 깊이 작용하고 있는 책들은 일부에 불과하다.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을 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물론 나를 성장시켜준 양서들에 대해 깊이 감사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겪었던 시행착오의 세월이,
지금에 와서는 꽤 아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평생 해온 독서 습관 때문에
요즘도 저녁에 책을 10여 페이지 정도는 읽고 잔다.
그런데, 이전과는 좀 다르다.
예전에는 어떤 책을 읽으면 굴비 엮듯이 연관된 책들을 찾아 읽었지만,
지금은 새로운 책을 찾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다.
굳이 새로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잘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 심리, 사회 부문에서 특히 그렇다.
이 영역은 책이 부족한 게 아니라,
이미 충분히 말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게다가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원래, 책에는 사유의 정수가 있다.
그런데, 이 분야 책들은 요즘 저자들일수록
독자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사유의 정수 추출 작업 몫이 지나치게 크다.
즉, '정제 효율이 크게 떨어진다'는 게 치명적이다.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들은 그런 책들에 의해 발생됐다.
사유가 빈약하면 정제 작업할 이유마저 없고,
현학적이지만 논점을 흐리게 하면
정제 작업에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러다 보니,
'양서처럼 대우받는 유사 양서들'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게 됐다.
이런 유사 양서는,
화려한 지식 나열과 거대 서사를 제시해 사고를 확장한 듯한 느낌을 주지만,
삶의 현실 앞에서는 쓸모없는 초라한 조언만을 남기고 물러나는 저자들에 의해 생산된다.
읽는 동안은 지적으로 짜릿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삶의 일상에서 작동할 수 있는 사유의 정수는 없다.
이런 유사 양서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은 잘 알게 됐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양산한다는 점에 있다.
무엇보다 이런 유사 양서들은 '인간소외를 강화한다'는 공통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은 새로운 책을 찾는 것은 무의미했다.
내게 적합한 양서는 소수였고,
이들을 평생 곁에 두고 반복해서 읽어가는 게
훨씬 유익하다는 결론으로 수렴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를 추종하거나 추앙하지는 않는다.
독자는 저자를 언제든 졸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책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책 속에는 동의하는 내용들이나 반론해야만 하는 내용들이 당연히 있다.
모든 저자에게는 '그들 고유의 인식과 사유의 사각지대'가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 독서 끝에 알게 된 것으로,
많이 읽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을 가려내는 일이었다.
독서는 독서 분량의 축적보다는 양서 선별의 문제이고,
그렇기에 독서는 양서가 담고 있는 사유의 정수를
어느만큼 체화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 '양서는 보편적인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 나는 이렇게 답한다.
보편적일 수도 있고, 개별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니체의 저서를 읽었을 때 사랑과 희열을 느끼지만,
다른 어떤 사람은 같은 니체를 읽고 파시즘으로 기울기도 한다.
이 경우 니체의 저서는 양서일까, 아니면 독을 품은 유사 양서일까?
마찬가지로,
노자, 논어를 수십번 읽은 어떤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다른 어떤 사람은 사람다움과 정반대의 길을 간다.
그렇다면 이런 사례들에서 새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애초에 독자 자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 지점에서 나는 아직도 분명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는 알고 있다.
독서를 통해 사유의 정수를 스스로 정제하고 체화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극단적인 이분법이나 파시즘에 빠지지 않으며,
타자와 공존하고 공생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여부에 상관없이 말이다.
'음,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26년 2월 4일
Son the writer(aka 엠마네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