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당제'와 ‘승부의 비할당화’가 공유하는 아이러니한 평등
요즘 제도권의 담론들은 하나같이 좋은 말을 사용한다.
공정, 평등, 보호, 배려.
어느 하나 반대하기 어려운 단어들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런 단어들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며 외칠수록,
사회는 더 예민해지고 사람들은 더 불안해진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말없이 이탈하고 있다.
같은 시공간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접점을 잃어버린 상태다.
우리 사회는 정말 더 공정하고 평등해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공정과 평등을 요구하는 방식 자체가
어딘가 어긋나고 있는 걸까.
이런 질문들은 언뜻 보면 달라 보이는
두 가지 사회 현상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는 '할당제'이고,
다른 하나는 '승부의 비할당화'이다.
'할당제'는 구조적 불평등을 보정하겠다는 취지에서 출발한다.
이는 출발선이 서로 다른 사회에서 결과만으로는
공정을 말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했다.
한편, '승부의 비할당화'는
요즘 초중등 학교 운동회에서 흔히 그러고 있는데,
이는 아이들의 자존감 상처를 방지하기 위해
순위와 승패, 상 자체를 없애는 방식이다.
'할당제'가 결과를 미리 특정 부류에 배분한다면,
'승부의 비할당화'는 모두에게 결과를 무효로 한다.
그렇게 두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질문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결과를 사회가 어디까지 감당해야 하는가'이다.
할당제와 승부의 비할당화는 모두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에서 출발한다.
이는 이상만 놓고 보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출발점이다.
'차별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이에 관한 한, 나 역시 일치한다.
그러나, 차별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를
사회와 타자에게 내면서 뭔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가 된다.
예로, 나는 차별 반대 인권 캠페인 강연을 들은
청소년 학생들과 대화를 나눴던 경험이 있다.
당시 학생들은 참여한 소감을
리포트로 써야 한다며 고심하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조금 뜬금없지만, 이랬다.
“여러분은 어떤 휴대폰을 제일 좋아하나요?”
학생들은 망설임 없이 최신 최고급 기종이 좋다고 답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되물었다.
“그럼 여러분은 저가형 보급폰을 차별하고 있는 거네요?”
학생들은 잠시 생각하더니,
]상품과 사람은 다르다]고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질문을 조금 바꿨다.
“여러분 앞에 두 사람이 있어요.
한 사람은 대기업 회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노숙자인 거죠.
둘 중 한 사람과만 점심을 먹으며 대화할 기회를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누구를 선택하겠어요?”
학생들은 모두 대기업 회장을 선택하겠단다.
잠시 침묵이 있고 나서,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은 아마 외모와 신체 조건이
더 매력적인 이성과 사귀고 싶을 거잖아요?”
학생들은 모두 꺄르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의 반응은 다음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차별 없는 세상은 이상으로는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차이를 판단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실제로는 차이를 또렷이 인식한다.
물론 차이는 자연스럽게 거리감과 불편함을 발생시킨다.
문제는 우열 감각과 그에 따른 논리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은
조상님들도 마찬가지였음을 알려준다.
청소년들과 미혼 남녀의 외모 우선 선택 경향은
요즘 들어 더욱 두드러지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실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 기준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침해되지 않는 한,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고 인정한다.
그게 성숙한 어른의 사고와 태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자신의 취향을 무조건 존중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우리 자신의 경계와 존엄을 침해한다면
우리는 그런 요구를 존중해줄 수 없다.
이는 누구라도 그럴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모습은
‘차별 없는 세상’이 아니라,
차별이 덜 폭력적이고,
덜 고정적이어서 포용의 폭이 있고,
덜 잔인한 세상에 가깝다.
세상은 차이로 가득 차 있다.
서로 다르고, 서로 불편하다.
그런 상황에서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차별을 없애겠다고 나서면
오히려 더 큰 차별과 위선을 낳는다.
이제 다시,
할당제와 승부의 비할당화에 초점을 맞춰 보자.
문제는 이 두 방식 모두
결과를 ‘회피’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쉽다는 점이다.
차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공식적인 사회 언어에서만 삭제된다.
지금 나는 평가와 서열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더 잘했고,
누가 더 준비되어 있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말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게 되면
그 결과, 차이는 비공식적인 위계로 숨어 자리하고,
말할 수 없었던 좌절은 개개인 내부에 축적된다.
이것은 평등의 확장이라기보다,
원한의 축적과 어느 시점의 폭발을 야기하는 원인이 된다.
물론 현대 사회는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차이와 차별 역시 심해지고 있기에,
그런 온갖 사회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사회적 책임이 커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책임에 따른 보호와 케어에
경계가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책임에 따른 보호와 케어의 개입 수준이
인간을 대신하여 살아주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의 존엄은 서서히 약화된다.
존엄은 고통이 없는 상태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감당하고 있다는 감각에서 나온다.
모든 실패가 제거되고,
모든 결과가 인위적으로 보정되면
인간은 안전해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결과, 인간은 공허에 빠지게 된다.
차별을 없애겠다면서
인위적인 보호와 케어가 개입 수준이 되어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점점 더 무기력해진다.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한
체험의 고통과 성패 의미를 말할 수 없게 된다.
즉, 실패를 견디는 능력뿐 아니라,
성취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힘도 함께 사라진다.
할당제, 승부의 비할당화의 흐름이 특히 위험한 이유는
강제의 방식이 도덕 언어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덕이니까 마땅히 그래야 한다.'
즉, 모두를 위한 선이라는 도덕적 대의명분만 제시된다.
그런 도덕적 대의명분에 대한 이의 제기는 불리해지기 쉽다.
반론을 지닌 다수에게 명시적인 다른 선택지를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어놓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먼저, 개인 차원에서는 암묵적인 선택지만이 남는다.
즉, '말없는 비동의로써 이탈하는 것'이다.
이는 같은 시공간에 있어도 엮이지 않는
암묵적인 거리두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게 계속 지속되면
모두의 공멸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를 구조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최종 책임 주체는 결국 '국가'일 수밖에 없다.
즉,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상대적으로 쉬운
승부의 비할당화에 대한 해법부터 보겠다.
사회는 패배에 따른 자존감의 상처를 피하기 위해
결과를 지우는 요청을 들어주는 대신,
결과를 존엄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결과를 없애지 않고 인정하면서
결과를 해석하는 언어를 복원하는 것이다.
왜 졌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다음에는 결과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
사회와 개인들이 모두 말하고 논의할 수 있게 한다.
다음으로, 할당제에 대한 해법을 살펴보자.
사회는 할당제의 속성을
조건부에 일시적 보정 제도 장치로 재정의한다.
할당제는
영구적인 권리나 도덕적 우월성의
증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구조적 불리함이 확인된
특정 조건에서만 작동해야 하며,
반드시 종료 시점과 평가 기준을 함께 가져야 한다.
목적은 할당 비율의 고정이 아니라,
할당제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태로 이동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할당제는 목표가 아니라 과도기적 수단이어야 한다.
결과를 대신 만들어주는 제도가 아니라,
결과에 도달할 경로를 복원하는 보조 장치로만 존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는 보호와 케어는 하되
개인을 대신하여 살아주듯이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실패를 제거하는 대신,
실패 이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회복의 바닥과 경로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다.
사회는 인간을 보호할 수는 있어도,
인간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이런 해법을 제시했지만,
이게 정말 현실로 이뤄질까.
가능해질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숙고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불평등을 줄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마음에 불편한 결과를 보지 않으려는 것일까.
하나의 권리를 온전히 실현하면 독재자가 되고,
다수는 독재자의 그런 권리 하나때문에 고통받는다.
그럼 권리는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보호와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서 무엇까지 제거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두를 위한 도덕이나 권리 제도라고 할 때,
그 ‘모두’에는 정말 모두가 포함되고 있을까.
평등은 결과를 지우는 데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데서 오는 것일까.
밤 중에 모처럼 글이 길어진 것 같다.
오늘 따라 니체와 한나 아렌트가 유난히 떠오른다.
하지만 더 쓰기에는 졸음이 소떼처럼 몰려온다.
2026년 2월 6일
Son the writer (aka 엠마네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