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서윤
3.
엄마, 나, 여명은 모두 버림받은 존재다. 엄마와 나는 아빠에게, 여명은 친척들에게. 당시 8살이었던 나는 아빠가 우리를 싫어해서 떠난 줄로만 알았다. 몇 년 뒤에야 아빠가 떠난 진짜 이유를 엄마에게 듣게 됐는데, 아빠가 다른 여자에게 가기 위해 엄마와 나를 버렸다는 것이었다. 엄마 딴에는 아빠가 나를 싫어했다는 오해를 남기지 않으려고 한 말이겠지만 이러나저러나 기분이 더럽긴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집을 나간 아빠와 깔끔하게 이혼한 뒤 서울에서 먼 지방으로 이사를 왔다. 이곳에 살면서 엄마가 먼저 아빠 이야기를 꺼내는 법은 없었다. 엄마는 흰색 벽의 얼룩을 페인트로 덧칠하듯 아빠의 흔적을 우리 생활의 저 밑바닥에 묻어두었다. 얼룩은 사라졌으나 페인트 냄새는 우리 안에 깊이 스며들었다. 엄마와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해 친구가 없고 자주 외롭지만, 우린 서로의 속내조차 잘 알지 못한다. 힘들게 덮은 아빠의 기억을 다시 들추어낼 순 없기 때문에.
그러니 여명이 관심을 갈구하는 게 충분히 이해되고, 한편으론 얼마나 외로우면 저럴까 짠하기도 하다. 다만 왜 하필 그 대상이 나인지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여명을 데려온 사람은 엄만데, 엄마는 아이에게 거처와 먹을거리를 제공해 줄 뿐 아이를 제대로 돌보진 못했다. 엄마와 여명 사이에는 확실하게 그어진 경계가 있다. 여명은 엄마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없었고 엄마도 처음에만 여명을 챙겼지, 함께 산 지 며칠이 지나고 나서는 꼭 필요한 말-"여명아 밥 먹어" "이모 없을 때 혼자 잘 있었어?" 같이-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여명을 조심스럽게 대하는 건지 아니면 엄마도 여명을 들인 걸 후회하고 있는 건지. 어느 쪽이든 엄마는 책임질 의향이 없어 보였고, 나는 동화 속 주인공인 엄마의 그림자 역할을 하는 데 지쳤다.
선 넘는 여명의 도발을 더 이상 받아주기 힘들었다. 그래서 여명이 내 방을 찾아올 때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표정과 단답으로 일관하고는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여명은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아 당황스러워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나를 찾지 않았다. 상처받았나 신경 쓰이는 것도 잠시, 아이와 나 사이에 세워진 냉담이라는 벽으로 인해 숨통이 좀 트였다. 여명을 내보내고 싶다는 생각은 서서히 옅어져 갔다.
*
그 무렵이었다. 도서관에 갔다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왔는데, 아침까지 멀쩡했던 자전거가 양쪽 바퀴 모두 바람이 빠진 채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타이어를 자세히 살펴보니, 윗부분의 고무가 살짝 찢겨 새끼손톱 크기의 구멍이 허옇게 드러났다. 이런 일을 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여명. 이제 말로 도발해서는 시선을 끌지 못하니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인 자전거에 손을 댄 거였다.
엄마는 장을 보러 마트에 나가 집에 없었다. 나는 안방 앞에 서서 감정을 누르고 담담하게 여명을 불렀다.
“여명아, 나와봐.”
“왜요?”
두 글자에 담긴 적대감만이 방문을 뚫고 나왔다.
“여명, 할 말 있으니 나와 보라고.”
여명이 그제야 문을 열고 느긋하게 방에서 걸어 나왔다.
“내 자전거 타이어 건드린 거 너지.”
“네? 무슨 말이에요?”
여명은 내가 착각했나 싶을 만큼 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능숙한 거짓말에 소름이 돋았다.
“집에 있던 사람이 너밖에 더 있어? 매번 복도에 뒀지만,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네가 한 거 맞잖아. 똑바로 말해.”
“저는 오늘 집 밖으로 나간 적 없고, 언니 자전거에 관심도 없어요.”
숨을 가다듬고 여명에게 한마디 더 하려던 찰나, 현관문이 열렸다. 장바구니를 든 엄마가 놀란 얼굴로 우리를 바라봤다.
“너희 지금 뭐 하니?”
내가 여명보다 한 박자 빠르게 답했다.
“엄마, 밖에서 못 봤어? 얘가 내 자전거 타이어 펑크 냈어.”
“아니에요.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엄마는 우리의 눈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조용히 주방으로 걸어갔다. 여명과 나는 숨을 죽여 엄마의 반응을 기다렸다. 엄마가 식탁에 장바구니를 올려두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여명이가 아니라고 하잖아.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 봐, 서윤아.”
“쟤가 한 것 맞다니까. 그동안 저런 일 한 번도 없었던 것 알잖아. 쟤는 저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애라고!”
나는 소리를 지른 뒤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여명과 계속 같이 산다면 나는 스트레스로 미쳐버릴 수도 있다. 이제는 여명을 내보낼 때가 되었다.
*
엄마가 점심 먹으라며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안 먹는다고 신경질적으로 내뱉고는 책상 의자에 앉았다. 엄마는 여전히 옛날식이다. 보육원에 가는 게 뭐 그리 나쁘다고. 우리 집에서 눈칫밥 먹느니 차라리 그곳에서 지내는 게 여명에게 더 나을 텐데.
하지만 이런 논리로는 엄마를 설득할 수 없으므로 엄마의 연민을 자극해야 한다. 내가 여명보다 더 불쌍해질 수 없으니 대신 여명이 얼마나 불행한지 보여줘야겠다. 여명이 나의 관심을 받기 위해 계속 도발해 왔고 급기야는 자전거까지 망가뜨렸지만,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어서 그 아이에게 충분한 관심을 줄 수 없다. 그러니까 안타깝지만 이건 서로를 위한 것이다.
당연히 엄마와의 대화는 여명이 모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여명이 항상 집에 있기 때문에 그 애가 모르게 엄마와 둘이 대화할 시간과 장소를 마련할 수가 없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타이밍을 잘 맞추기만 하면 엄마와 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엄마가 초등학교에서 하는 방학 중 글쓰기 교실을 가는 날,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엄마를 데리고 카페로 가면 된다.
여명이 우리 집을 나가면 그 아이를 완전히 잊을 것이다. 여명의 하중으로 짓눌려 있던 마음이 드디어 해방될 수 있는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