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여명
3.
서윤 언니와 달리 이모는 늘 우아하다. 이모는 언니가 나가고 나면 커피를 내려서 거실 탁자에 자리를 잡는다. 꽃무늬 방석에 앉아 노트북으로 동화를 쓰는 이모를 보고 있자면, 거실이 현실과 동떨어진 새로운 세계 같다. 아무도 거실이 이모의 자리라고 정해둔 건 아니었지만, 이모도 서윤 언니도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아무리 답답해도 이모가 글을 쓰는 시간에는 절대 거실로 나가지 않았다. 무겁게 눌린 공기를 깰 용기가 없어 안방에서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종합장이 빨간 언니로 채워지며 나의 마음도 빨갛게 물들어갔다. 처음엔 서윤 언니에게 나도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지만, 점점 더 오래 언니를 들여다보게 됐다. 나는 종일 언니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언니가 오면 방에 찾아가 나만의 방법으로 언니를 공격했다.
“언니 공부 잘해요?”
“인서울 못하겠네요 그럼.”
“친구들은 언제 만나요?”
“혹시 친구가 없어요?”
서윤 언니가 귀부터 시작해서 얼굴 전체와 목까지 붉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언니가 그때 가장 생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언니를 보며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한편으로는 아빠도 없고 친구도 없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언니는 귀를 닫아놓기라도 한 듯 회색빛을 띠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가식적인 어른들처럼, 그리고 거울 속 나처럼.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언니에게 드리워진 황량한 잿빛을 떼어낼 수 없었다.
나는 종합장에 그려진 언니 위로 회색 회오리를 칠했다. 종이에 구멍이 날 때까지 힘주어 마구 문질러댔다. 내 심장도 색연필의 움직임과 함께 펄떡펄떡 날뛰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두근거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밥 먹을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잠을 잘 때도 심장의 헐떡임을 느꼈다. 이런 기분을 다른 사람들도 알까.
이모에게 내 상태를 알려야 하나 고민이 됐다. 이모는 증상을 듣자마자 병원에 데려갈 게 뻔했다. 아마도 의사와 이모 모두 나를 문제 있는 아이로 바라보겠지. 그럴 바엔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게 낫다. 지금보다 더 비참해지기 싫으니까.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서윤 언니 때문이다. 애초에 언니가 나한테 매정하게 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서윤 언니도 한순간에 소중한 걸 잃는 억울함을 직접 겪어봐야 한다. 그럼 언니도 이런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언니의 물건을 가져가면 감출 곳이 없으니 아예 못쓰게 만들어야겠다. 언니의 일상 속 물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액정이 깨진 휴대폰, 매일 입는 회색 추리닝 바지, 너절한 헝겊 필통…… 이런 것들 말고 언니가 아끼는 게 없을까. 순간 어떤 물건이 한 장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빨간색 자전거.
언니가 자전거를 자주 사용하는 건 물론이고 빨간 자전거는 언니를 가장 잘 나타내는 물건이다. 낡고 초라하지만 어딘가 씩씩해 보이는 모습. 그 자전거 하나면 충분하겠다.
나는 조용히 지내며 이모와 언니가 모두 외출하기만을 기다렸다. 며칠 뒤 언니는 도서관에 가고 이모는 장을 보러 나가서 혼자 집에 남게 되었다. 언니의 방에서 길쭉한 컵에 꽂힌 가위를 가지고 나왔다. 옅은 회색의 타일이 빼곡하게 깔린 복도 끝 구석에 빨간색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자전거에 가까이 다가가자, 사람을 해치기 직전처럼 가위를 든 손이 벌벌 떨렸다. 그냥 자전거일 뿐인데.
양손으로 가위를 쥐고 가위 날을 벌렸다. 그리고 한쪽 날의 뾰족한 끝부분을 자전거 바퀴에 댔다. 손에 힘을 주며 세게 눌렀지만 자전거 바퀴는 생각보다 질겼다.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시도했을 때 ‘피식’하고 바람이 빠지며 가위 날이 타이어 안으로 들어갔다. 가위를 다시 빼자 손에 끈적하고 불쾌한 느낌이 퍼졌다. 반대쪽 타이어에 같은 행동을 하는 동안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니의 소중한 것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생각은 타이어와 함께 찢어져 날아가 버렸다. 오히려 바람이 빠질 때 타이어 안에 갇혀 있던 공기가 된 듯 해방감을 느꼈다.
자전거는 금방 힘없이 내리 앉았다. 문득 자전거와 서윤 언니가 겹쳐 보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언니. 아무도 일으켜 주지 않아 끝끝내 일어나기를 포기해 버린 언니.
나 때문에 서윤 언니가 그렇게 될 것만 같아 등골이 오싹해졌다.
*
“여명아, 나와봐.”
화를 참는 듯한 언니의 목소리에 몸이 얼어붙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언니가 나를 쫓아낼까. 끝까지 모른 척 잡아떼면 주변 cctv를 돌려 보는 건 아닐까. 내 머리는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만을 떠올렸다. 나는 시간을 벌고자 말했다.
“왜요?”
언니는 다시 한번 할 말이 있으니 나와 보라고 했다. 이제 진짜 결정을 해야 할 때였다. 미안하다고 싹싹 빌까, 뻔뻔하게 모른척할까. 방문으로 느릿느릿 걸어가며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내 자전거 타이어 건드린 거 너지.”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려 했는데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네? 무슨 말이에요?”
“집에 있던 사람이 너밖에 더 있어?”
언니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언니에게 솔직하게 말할 기회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실은 그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거짓말을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이 말을 멈추지 않았다.
“무슨 말이에요. 저는 오늘 집 밖으로 나간 적 없고, 언니 자전거에 관심도 없어요.”
그때 이모가 들어왔다. 바로잡을 기회라는 걸 알았지만, 내 안의 겁쟁이가 솔직해지기엔 이미 늦었다고 속삭였다.
“아니에요,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이모는 나의 말을 믿는 듯 보였다. 내가 먼저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입안에서 거짓말의 텁텁한 쓴맛이 났고, 손에는 타이어의 끈적이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서윤 언니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는 '지금 나가는 거니'라는 이모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쌩하니 나가 버렸다. 침대에 앉아 휴대폰으로 재미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데, 이모가 방문을 두드렸다. 이모는 들어오자마자 언니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뗐다.
“서윤이가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밥은 잘 먹고 다닐까 걱정이네. 그치 않니?”
당연히 이모는 이런 잡담을 나누려고 온 게 아니었다.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이모 앞에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모가 침대에 걸터앉아 발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발끝에 닿은 이불의 감촉은 차갑지만 부드러웠다. 이모가 이어서 말했다.
“여명아, 혹시 자전거 사건 네가 했다면 이모한테 꼭 솔직하게 말해줘. 그래야 이모가 도와줄 수 있어.”
이제는 정말 내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질 때였다.
“저, 그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모 그거, 제가 한 거 맞아요……”
그 후의 기억은 쏟아지는 눈물에 젖어 흐릿하게 남아 있다. 나는 꺽꺽거리며 울었다. 죄송하다고 나는 나쁜 아이라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소리 높여 말했다. 이모는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잠잠히 들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유기 동물 이야기나 서윤 언니에 대한 복수심은 털어놓지 않았다. 이모도 더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이모와 나는 서윤 언니가 오기 전에 타이어를 바꾸러 자전거 수리점에 갔다.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자전거는 마치 탈진해서 쓰러진 사람 같았다. 자전거 수리점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10분 정도로 가까웠지만, 자전거를 끌고 그곳까지 가는 건 쓰러진 사람을 질질 끌고 병원에 가는 것처럼 고된 일이었다.
자전거 수리점에 도착하자, 주인아저씨가 바퀴를 보더니 누가 이렇게 해놓았냐며 혀를 찼다. 이모는 아저씨의 말에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분명 이모도 나처럼 복잡한 마음을 속으로 삼켰겠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더 뜨겁고 습했다. 우리의 발걸음도 덩달아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