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11)

4부. 서윤

by 소냐

3.


어떤 장면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여명의 웃음이 꺼내온 건, 오래전 아빠의 웃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기억의 조각들을 연쇄적으로 불러일으켰다. 부고 전화를 받고 눈물을 흘리던 엄마, 동생이라 생각하고 여명을 잘 부탁한다던 말, 여명과 처음 마주 앉았을 때 느껴지던 기묘한 익숙함. 모두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졌다.

여명. 아이 이름이 여명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술만 마시면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푸른빛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슬픈지 설파했던 아빠. 일곱 살의 어린 나는 그 말을 듣는 게 싫었다. 아빠가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아빠가 너무 작아 보였기 때문에. 그때 아빠의 삶에서 새롭게 떠오른 빛이 저 아이였다니, 저 아이가 아빠의 삶을 아름답고도 슬프게 만들었다니. 참을 수 없이 모욕적이었다.

엄마는 이 모든 것을 알고도 여명을 데려왔다. 어떻게 내 앞에 아빠의 여명을 데려올 수가 있지. 여명과 나의 몸에는 같은 피가 흐르니 정말 여명을 동생처럼 생각하고 돌봐줄 거라 생각이라도 한 걸까? 이 괴상한 동거가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야? 대책 없이 순수한 엄마를 향한 원망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정작 이 말도 안 되는 드라마의 주인공인 여명은 아무런 의심 없이 자기 과거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입에서 푸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 엄마 아빠가 그렇게 만난 거예요.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소문이 쫙 퍼져서 모를 수가 없었어요. 아빠가 자기 가족을 버리고 엄마를 선택했다는 걸요. 어느 날은 제가 자기 친구랑 친해지니까 질투가 난 여자애가 그 친구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다 들리는 목소리로. ‘쟤랑 놀지 마. 쟤네 엄마 아빠 좀 이상해.’ 엄청 억울한데 그게 사실이니까 아니라고 하지도 못하고. 그냥 무시하는 게 습관처럼 돼버렸어요.

근데 진짜 웃긴 건 뭔지 알아요? 저는 아빠한테도 사랑받는다고 느낀 적이 없다는 거예요. 맨날 바쁘고. 엄마랑 싸우기만 하고. ……”

미안하게도 나에게는 여명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여유가 없었다. 상처 입은 아이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떡볶이집의 허공을 배회했다.


여명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요동치는 감정을 잠재우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는 내내 멀미할 때처럼 속이 울렁거려 메스꺼웠다. 지난번 꿈속에서 느꼈던 감각. 나는 여명이 말하는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울렁임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다. 멀미는 몸이 흔들리는 방향과 내가 인식하는 방향이 다를 때 생긴다. 나의 이성은 여명을 보듬으라고 말하는데 나의 몸은 여명을 거부한다. 마음은 여명을 위로하라 속삭이지만, 나의 입은 여명을 할퀴고 싶어 한다. 우리 가정을 파탄 내놓고 이제 와서 불행했다고 말하는 그 입이 가증스럽다고.

배 안에서 꿀렁이던 감정은 점점 거세게 출렁거리더니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여명의 긴 한탄이 끝난 직후였다.

“그래도 넌 곁에 아빠가 있었잖아.”

여명은 젓가락으로 순대를 집으려다 멈칫했다. 아이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여명은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여명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입에서 역겨운 맛이 돌았다. 분노와 혐오, 질투와 자기 연민이 뒤섞인 더러운 구토의 맛이었다. 여명이 돌아온 뒤 우리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가 없어, 먹다 남은 음식이 지저분하게 늘어진 테이블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왔다.


*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싶었다.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고 그동안 했던 말과 행동도 전부 사라지면 어떨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어둠과 고요함에 파묻히니 정말로 내가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그 상태에서 감정도 차츰 가라앉았다.


여명은 곧 시설에 가게 된다. 이 여름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경험했던 이상한 꿈 정도로 남을 것이고, 여명과 나는 각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아마 평생 만날 일이 없겠지. 그럼 이 악취 나는 감정이 해소될까, 소설 속 인물처럼 과거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걸까, 마침내 아빠가 남긴 잔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감은 눈 위로 아빠의 얼굴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얼굴에 드러난 모든 선이 물에 젖어 번진 듯한 모습이었다. 아빠는 점점 더 흐려지다 이내 여명의 선명한 얼굴이 그 위로 포개어졌다. 사진 여러 장을 연속으로 늘어놓은 영상처럼 여명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동공, 고집을 피우던 야무진 입, 수줍게 파인 인디언 보조개. 여명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언니도 여기 있으면 안 돼요?”

그 음성이 너무 생생해서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아이를 다시는 보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나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들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이불을 걷자, 깨끗하고 산뜻한 공기가 코를 타고 들어오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대로 여명을 보내면 안 된다.


*


다음날 엄마에게 할 말이 있으니 잠깐 나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엄마도 여명을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으니 분명히 시설 입소를 취소하자고 하면 좋아할 것이다. 뭐라고 말할지 미리 되뇌던 그때 엄마가 왔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더 불안해 보였다.

“엄마, 지난번 그 카페로 갈까?”

엄마는 할 말이 많은데 겨우 참고 있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로 가는 길에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보려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엄마 지난번에 바닐라 라떼 진짜 맛있었지?”

엄마는 대답을 하지 않고 땅만 보며 걸었다. 그 걸음걸이가 너무 고단해 보여서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말없이 묵묵히 걸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목이 탔다.


카페 안에는 손님이 없어 한적했다. 지난번에 앉았던 테이블에 휴대폰과 지갑을 올려놓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뭐 마실래?”

“나는 그냥 물 마실게. 네 것만 시켜.”

바닐라 라떼와 함께 여명에게 가져다 줄 주스 한 병을 주문했다. 어제 함부로 말한 것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엄마는 사과 주스를 보고도 왜 샀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심드렁해 보이는 엄마의 맞은편에 앉으니 긴장이 되어 입이 안 떨어졌다.

“엄마, 그 있잖아……”

엄마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속을 알 수 없는, 하지만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한 눈이었다.

“여명이 입소, 그냥 취소할까?”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취소?”

엄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고는, 애정을 모두 거두어낸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와서?”

이전 10화여명(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