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화가ㅣ 1874-1947ㅣ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화가
니콜라이 레리흐의 그림에 대한 첫인상은 '신기하다'였다.
그야말로 전에 이런 그림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모르고 봤을 때보다 알고 보니 더욱 감동이 큰 걸로 따지면, 니콜라이 레리흐 만한 화가가 없는 것 같다.
'러시아의 뿌리, 루스'와 '인도의 불교'에 빠져버린 화가, 고고학자이자 법학자이자 화가기도 했던 그,
니콜라이 레리흐 (Nicholas Roerich) 에 대해서 알아보자!
어린 시절과 성장 배경
1874년 10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니콜라이 레리흐는, 경제적으로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고 한다. 아래 아기 니콜라이의 사진만 봐도 금수저 느낌이 팍팍 난다. 벨트 디자인 위아래 세트 옷에.. 다부진 눈.. 야무지게 걸친 팔. 비범하다!
니콜라이 레리흐의 아버지, 콘스탄틴 레리흐는 레리흐 가문의 전통에 대해 아들에게 이야기해 주곤 했다고 한다.
우리로 따지면 '고조선'의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의 뿌리, '키예프 루스'의 전신을 세운 인물이 바로 루스계 바이킹 출신, '류리크' 다.
살짝은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믿거나 말거나! '류리크'의 후손이 '레리흐'라고 하신 아버지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니콜라이 레리흐!
Рюрик(류리크) 가문 일부가 독일로 넘어가 살면서 Rörich(료리흐) 라고 성을 쓰게 됐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면서 Рерих(레리흐)라고 성이 변화했으며, 레리흐 가문의 뿌리는 키예프 루스를 세운 키예프 가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그.
당연히 역사가 흥미로웠을 것이다. 나도 우리 가문 조상님이 단군왕검이었다면 고조선 공부를 더 열심히 했을지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에 있는 레리흐 가문의 저택, '이즈바라(Ishvara)'다.
이곳은 레리흐가 어린 시절 상트페테르부르크 본가보다 더욱 사랑했던 곳으로, 근처의 고고학적 유물들과 자연들을 탐방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Vorontsov 백작이 인도 여행 후 이곳을 '이즈바라'라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하면 '지극히 높은 주님'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여기서 이곳에서의 풍경도 많이 그렸지만, 여러 작품을 구상해내기도 했단다. 그야말로 영감의 원천!
무엇보다 이곳의 고고학적 환경이나, 인도 관련된 이야기들은 레리흐의 인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나중에 열정적으로 고고학을 공부한 것도, 인도를 너무 좋아해서 영국 사람들이 레리흐를 스파이로 생각할 정도로 인도에 다닐 정도가 된 것 모두, 다 이 이즈바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청년 니콜라이 레리흐
청년 니콜라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893년 곧장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학과와 황실국립미술 아카데미에 동시에 입학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은데, 이 대단한 사람. 두 학과 모두 졸업해 버린다. '엄친아' 그 자체다.
1897년 미술학위를 받고, 1898년 법학과 학위를 받는다. 심지어 미술학위를 받을 때 졸업작품으로 그린 작품 'Messenger. Generation after generation has risen'은 바로 트레찌야코프 눈에 들었고, 컬렉션 전시 작품으로 곧장 낙찰된다. 당시 트레찌야코프 눈에 들었으면 화가 인생 대성공인 건데, 졸업작품으로 그의 눈에 대번에 든 것이다.
황립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약 2년 뒤, 쿠인지 스튜디오에 들어가 화가 쿠인지의 제자가 되었다. 쿠인지만의 독보적인 신비한 그림채 등에 매료된 그는 쿠인지 밑에서 열공(?)했다고 한다. 아마 그덕에 졸업작품부터가 성공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결혼과 가족
니콜라이는 일단 다른 화가들에 비해 가정사가 참 안정적이다. 본인 집도 원래 부자인데, 아내 집안도 부자다. 심지어 아내와 금실도 좋다! 아내 옐레나는, 부유한 건축가의 딸이었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러시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쿠투조프 장군'의 손녀였다.
아내 옐레나는 어릴 때부터 언어, 그림, 음악 등 여러 방면에서 다재다능했고, 그녀만의 우아한 아우라에 많은 상류층 남성들의 마음을 홀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재능으로 가득 찬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그게 바로 니콜라이 레리흐였다.
레리흐는 정말 가정적인 사람이었고, 아내를 많이 사랑했다고 한다. 왠지 서로 닮은 이 부부는, 평생을 서로 지지해 주었다고 하는데, 레리흐가 피의 일요일 혁명(1905년) 이후 외국으로 돌아다닐 때도, 뉴욕, 중국, 인도 등을 돌아다닐 때에도 그들은 함께였고 죽는 그 순간까지 서로를 아껴줬다 한다.
이 부부 관련 재밌는 사실 하나.
옐레나가 미래를 볼 수 있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기도 하는데, 레리흐도 1차 세계전쟁(1914년) 이 터지기 전에 이를 예견하는 (물론 전쟁 전엔 전조 현상들이 있었겠지만..ㅎ)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학위 따지는 거 별로 안 좋아하긴 하지만.. 두 아들 모두 학위로 치면 엄친아라 할 수 있겠다.
큰 아들은 영국 캠버리지대, 작은 아들은 하버드 대학교 출신이다. 집안도 뒷받침되고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덕분인지 둘 다 지식적인 측면에서 풍족하게 자랐다. 큰 아들은 믿거나 말거나 30개 국어를 했다고 하고, 언어학자, 미술비평가, 민족학자이자 티베트학자였다고 한다. 아버지와 함께 인도 등지를 다니며 다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둘째 아들 스뱌따슬라프는 형과 달리 예술가가 됐다. 런던 황실 아카데미에서 건축학을 공부했고 미국으로 가서 건축학과 조각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극장 미술과 레리흐
세르게이 디아길례프는 지금 러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극장을 열었던 사람으로, 지금도 그를 기리는 디아길례브스키예 season과 같은 행사도 있다 한다. 레리흐는 그의 절친한 친구로, 그와 함께 무대장치 디자인을 많이 했다고 한다. 더욱이 루스와 고대문화를 좋아하는 레리흐다 보니, 이 역시 즐거운 작업이었을 테다.
대표 작품들이라 쓰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이라 읽는다!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그의 그림들을 소개해본다.
바이킹의 후손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감명을 받았던 게 여실히 보이는 그의 유명한 작품이다. 전형적인 바이킹 족의 배 문양이 잘 드러나있으며, 오른쪽에 서 있는 두명의 바이킹족은 두려움이 없어 보인다. 태양은 밝게 빛나고, 갈매기들이 시원하게 바이킹 무리가 갈 길을 안내하는 듯하다.
1903~1904년 니콜라이는 아내와 함께 러시아의 고대 도시이자 모스크바 근교 도시인 코스트로마, 니즈니노보고라드, 블라디미르, 수즈달, 프스코프 등을 여행했는데, 이 '고대 여행'의 목적인 러시아의 문화와 뿌리를 연구하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교회 예술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걱정도 하면서, 동시에 교회 외관이나 벽화도 많이 그렸다고 한다. 플레노보에 가면 스보트라고 하는 교회 지붕에 예수님 얼굴을 크-게 그리는 작업을 한다거나, 아들과 함께 내부도 아름답게 그리기도 했다.
아래 1905년 천사의 보물은 이러한 정신의 연장 선상에서 그린 것이라고 한다. 종교에 대한 그림이다. 몸이 새고 형상은 인간인 천사들은 러시아 고전 전래동화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뒤에 보이는 건물들은 14-15세기 건축물들로, 고대의 정신과 영적인 통합을 담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느껴진다.
니콜라이는 히말라야, 티베트, 알타이, 몽골, 만주, 중국을 자주 그리고 오랜 기간 여행했다.
탐험대와 함께 티베트에서 히말라야 산맥의 봉우리 뒤에 연꽃을 닮은 8개의 설산으로 둘러싸인, 전설적인 세계의 중심이 숨어 있다고 진심으로 믿으며 지상의 샴발라를 찾으려고 노력했단다.
샴발라는 티베트 불교 전설에서 내륙 어딘가에 있다고 믿어지는, 순수한 불교의 땅으로 인식되는 상상의 왕국이다. 레리흐는 샴발라의 사상에 매료되어 샴발라를 찾아 그 신비를 풀려고 노력했다. 그는 히말라야를 위대한 지혜와 깨달음의 장소로 여겼고, 그는 히말라야의 우주적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놀라운 색상 팔레트는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아티스트가 느낀 감정을 전달한다.
밑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 남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다. 사랑이란 그런걸까!!
레리흐는 이런 말을 했다.
"가장 어려운 일 앞에서 감탄을 멈추지 맙시다. 사랑의 불이 빛나면 어떤 장애물도 넘을 수 있습니다.”
레리흐은 정상으로 이끄는 여성과, 여성의 옷 가장자리를 붙잡고 전진하는 남성을 그렸다. 그는 그와 모든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하며 장애물도 극복해 낸 그의 아내 Elena에게 그림을 헌정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는 산이 많이 나온다. 산은 고난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고요를 나타내기도 한다.
니콜라의 레리흐의 또 다른 명언이다. “각 성취는 새로운 정상에 대한 열망이며, 여행에는 끝이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여정은 계속되고, 성취욕은 새로 보이는 정상에 대한 열망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고난 속에서도 마음의 고요를 찾아야 한다.
대조를 보여주는 그의 작품 스타일이 잘 드러나있다. 어깨를 잡고 있는 동작은 평화를 표현한다 한다. 다만 머리의 왕관과 라레쯔(가방)은 러시아 스럽다. 히말라야에 서있는 슬라브 왕이 새롭게 느껴진다.
선지자가 어떤 슬라빅 마을을 보고, 이 땅에 대해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장면이라 한다. 히말라야 풍경같은데 또 사원들을 보면 새로운 마을이 슬라빅 마을같다. 동시에 끝없이 보이는 산들이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그림은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작은 인간의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서 영감을 받은 거라 한다. 강과 빙하가 아래로 펼쳐지고 저 멀리 신성한 산의 눈 덮인 봉우리가 석양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동화 같은 풍경, 밝은 주홍빛 하늘, 명상하는 남자의 모습 등 이 모든 것이 독특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소련 당국은 레리흐가 러시아로 돌아가는 걸 허용허지 않았고 그는 결국 그는 티베트에서 심장병으로 죽는다
. 1947년 인도에서 사망한 그의 유골은 히말라야 산맥에 뿌려졌고 화장한 장소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