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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세인 Oct 20. 2022

EP0. 오롯이 홀로서기

바르샤바에서 쓰는 첫 번째 청춘일기

2022년 9월 23일 오후 2시 5분

약 13시간을 비행해서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바르샤바에 첫 발을 내딛으며 ‘습--후--' 하고 바르샤바의 공기를 온몸에 불어넣었다.

오랜 시간 비행을 한 탓에 답답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약 22년 9개월을 한국 공기를 마시며 살아오던 내가 처음으로 다른 나라의 공기를 마셔보는 거라 더 깊게 이 공기를 느끼고 싶었다.


제법 차가운 공기가 움츠려있던 내 세포 하나하나를 깨웠다.


설렘도 잠시 해외여행은커녕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게 전부인 내게 완전히 낯선 환경이 펼쳐졌다. 일단 얼레벌레 사람들이 우르르 타는 버스에 영문도 모른 채 내 몸을 끼여 넣었다. 버스 안에서 사정없이 몸이 흔들리면서 생각했다.


'아, 이거 착륙장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구나.'


나 혼자 작게 "아-"하는 탄성을 터트렸다.

예전부터 엄마가 '바보 도 터지는 소리'라고 부르던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잠시 뒤 버스가 정차하고 난 버스에서 내려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 뒤를 졸졸졸 따라갔다. 그리고 어딘가에 줄을 서길래 같이 줄을 섰다.

뭐하는 줄이냐고 물어볼 용기는 없어서 계속 뭐 하는 거지? 하면서 앞을 기웃기웃거렸다. 그분이 여권과 비행기 티켓을 꺼내길래 영문도 모른 채 나도 따라 꺼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이거 입국 심사하는 줄이는구나."


두 번째 바보 도 터지는 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이름도 모르는 한국분 덕분에 무사히 입국심사를 끝내고 내 짐을 찾으러 갔다.

회전초밥집에 돌아가는 레일처럼 엄청난 양의 캐리어들이 빙글빙글 도는 컨테이너 벨트 앞에 섰다. 내 초밥은 어디 있을까 하며 기웃기웃 대던 내게 파란색 스카프가 묶여 있는 베이지 색 캐리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내 짐이었다. (팔에 근력이 1도 없는 나로서는) 초인적인 힘으로 22kg짜리 캐리어를 내렸다.


'후, 첫 번째 미션 완료'


첫 번째 캐리어를 내리고 안도의 숨을 내쉬자마자 그 뒤로 무시무시한 초밥 하나가 눈에 띄었다.

흰색 스카프가 묶인 내 몸만 한 검은색 캐리어, 내 또 다른 짐이었다.

정말이지 그냥 모른척하고 가고 싶을 정도로 컸다.

'그래도 어떡해 뭐 해야지'하는 마음으로 캐리어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웬걸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캐리어를 내리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그렇게 내 캐리어는 두 번을 더 돌아야 했다. 세 번째 시도에서도 끝내 내 손을 떠나는 캐리어를 어떤 한 외국인 신사분이 들어 올려 줬다.

정말 그분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thank you를 5번 정도 말하고 난 짐을 챙겨 출구로 향했다. (출구를 찾는데도 한 10분은 걸렸지만 어찌어찌 찾긴 찾았다.)


그리고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welcome'이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 출구에서 나올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설레는 표정 덕분에 마치 나도 환영받는 기분이 들었다.


우선 근처에 보이는 의자에 앉아 13시간 동안 꺼져있던 내 핸드폰을 켰다.

난 한국에서 esim이라는 물리적으로 유심을 바꿔 끼우지 않아도 폴란드에 도착하면 바로 유심이 활성화되어 휴대폰을 이용할 수 있는 유심을 휴대폰에 내장해왔다.

그래서 난 자신감 있게 핸드폰을 켰다.


그런데 웬걸 내 esim이 활성화가 안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난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멘털 붕괴를 겪었다.


일단 공항 와이파이를 잡아서 esim을 샀던 폴란드 통신사 orange 고객센터에 문의를 했다.

한 1분 뒤 어떻게 하라는 장문의 답변을 받았지만 멘털 붕괴를 겪은 내 눈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난 카톡으로 일주일 전에 폴란드로 먼저 온 나의 한국인 룸메이트에게 연락을 했다.

자초지종을 말하자 친구가 맥도널드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유심을 사면 거기 직원이 알아서 유심을 바꿔 끼워준다고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난 누구보다 근심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맥도널드 옆 편의점을 찾아 나섰다. 한 5분 걸었을까 맥도널드가 내 눈에 보였고 바로 옆에 편의점이 있었다. 난 편의점으로 걸어 들어가 청소를 하고 있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How.. can i get a usim?"


애석하게도 그 말이 thank you를 제외하고 바르샤바에서 처음으로 말하는 영어였다.


직원은 저쪽에서 사면된다며 유심이 파는 곳을 가리켰다. 유심 종류가 엄청 많았고 난 계산대 앞에 있는 직원에게 usim을 원한다고 했다.

그 직원은 여러 개를 추천해줬지만 난 그저 "first one."이라고 외쳤다.

계산을 하고 직원이 그냥 내게 유심을 주길래 바꾸는 걸 도와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직원은 "sure" 하더니 척척 유심을 바꿔줬다.


표정은 엄청 딱딱한데 해 돌라는 건 다 해주는 츤데레 직원이었다.


그 츤데레 직원과 친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유심 문제를 해결하고 드디어 공항 밖으로 나왔다.


사실 이땐 유심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여서 머릿속엔 "얼른 집에 가야 한다."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리고 한국의 카카오 택시 같은 uber어플을 이용해 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정말 안 잡혔지만 지금 이 짐을 들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용기는 없었기에 그냥 하염없이 기다렸다.

20분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택시가 잡혔고 몇 분 뒤 택시가 도착했다.


내가 짐을 옮기려고 하자 택시 기사님이 "no"라고 말하더니 자기가 옮겼다. 아까 편의점 직원처럼 표정은 없지만 행동은 친절했다.


여기서 깨달았다.

‘아, 이 츤데레 같은 성격이 폴란드 사람 특징이구나’


기사님 덕분에 편하게 짐을 트렁크에 넣고 택시에 탔다. 집으로 향하는 길, 그제야 마음이 놓였고 주변 풍경이 보였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이국적인 풍경, 다큐멘터리로만 봤던 유럽 풍경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서야

‘내가 진짜 바르샤바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불안함만 가득했던 내 마음속에 설렘이 조금 피어났다.


10분쯤 갔을까 집 근처에 도착했고 날 기다리고 있는 친구가 보였다.

정말 너무너무 반가웠다.

친구 얼굴을 보는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탁 풀렸다.

여전히 표정은 없지만 친절한 택시 기사님이 내 짐을 모두 내려줬고 친구와 난 짐을 나눠 들고 우리가 약 반 년동안 살 집으로 향했다.


우리가 사는 곳은 플랫인데 한국으로 치면 빌라 같은 곳이다.

하지만 여긴 엘리베이터가 없다.

심지어 우린 4층에 살아서 내 짐을 다 가지고 올라가는데 정말 팔과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다.

그래도 친구가 있었어서 다행이지 나 혼자 그 짐을 들고 올라가려고 했으면 짐 옮기는데만 1시간은 들었을 것이다.


짐을 다 올려놓고 집으로 들어가니 친구가 준비한 웰컴 티가 있었다.

소파에 앉아 웰컴 티를 먹는데 이제 힘든 일은 다 끝났다는 생각에 마지막 조금 남아있던 긴장까지 풀렸다.


친구가 배고프지 않냐며 폴란드의 국민 음식이라는 '피에로기'를 구워줬다.

만두와 생긴 건 비슷한데 맛은 속에 고기가 들어있는 송편 맛이다. 겉에 피가 너무 두꺼워서 진짜 떡을 구워 먹는 맛이 든다.

김치랑 먹으면 나름 맛있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 피에로기가 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피에로기로 대충 주린 배를 채우고 짐을 정리했다.

난 이불과 베개를 가져오지 않았는데 친구가 여기 집주인이 가져다 놓은 이불과 베개가 있긴 하지만 하나 사는 게 어떻겠냐며 집 근처 대형 쇼핑몰에 가보자고 했다.

나도 얼른 이불과 베개를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다고 하고 집을 나왔다.


도로를 달리는 기차와 같은 트램을 타고 쇼핑몰로 향했다. 난 표를 사는 방법, 트램 타는 방법 등등 정말 아무것도 모르니 그냥 친구가 하라는 대로 했다.


초등학교 1학년 처음 버스를 탔을 때 엄마가 "이걸 여기에 찍으면 돼. 여기에 앉으면 돼. 여기서 내려야 해 기억해." 하면서 나한테 하나하나 가르쳐줬던 기억이 나면서 마치 내가 다시 8살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10분 정도 트램을 탔고 쇼핑몰이 보였다. 트램에서 내려 쇼핑몰로 향했다. 이불과 베개를 사려고 봤지만 담요, 쿠션 같은 것만 있고 적당한 이불과 베개가 없어 우린 그냥 내일 이케아를 가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짧은 쇼핑이 끝나고 쇼핑몰에서 나와 다시 트램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장시간 비행과 유심 문제, 짐 문제로 고생했던 내 몸과 마음이 이젠 잠을 원한다고 나한테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난 집에 들어가 바로 씻고 집주인이 가져다 놓은 이불을 대충 깔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바르샤바에서 첫날밤,

내 인생 처음 독립하는 날의 밤이 그렇게 저물었다.


이제부터 난 바르샤바에서 오롯이 홀로 서야 한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오롯이 홀로.


그 여정이 물론 쉽진 않겠지만 오히려 기대가 된다.

오롯이 홀로 설 힘을 가진 내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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