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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 Oct 23. 2022

즐기는 자를 당해낼 수 없다

너희가 모두 챔피언!

    

6년 전 봄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둘째가 초등학교 3학년에 탁구 방과 후를 시작했다. 처음 탁구 방과 후 교실을 신청해 달라는 요청에 나의 반응은 ‘으응?’ 이랬다. 창의 미술이나 바이올린 등 대체로 정적인 방과 후 활동을 주로 했었기에 뭔가 뜬금없다고 느껴졌다. 그래도 아이가 원하는 게 있다면 대부분 찬성하는 편이라서 아이의 뜻대로 해 주었다.


 “엄마, 나 라켓 사줘.” 며칠 후 아이가 말했다. 그래. 탁구 치려면 탁구채와 공이 있어야지. 그래, 그래, 사야지. 말은 알겠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하다가 힘들면 탁구채가 집안 어딘가를 굴러다니다가 처박히겠다 싶어 저렴한 탁구채를 사려 마트로 향했다. 벌써 탁구 방과 후 교실을 신청한 다른 아이들이 휩쓸고 간 후였는지 남아있는 탁구채는 몇 개 되지 않았는데 남아있는 탁구채를 보니 너무 장난감처럼 생겨 실소가 나왔다. 아이의 눈에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시큰둥했다. 아이가 얼마나 할는지 몰라도 장난감처럼 생긴 탁구채는 영 아니다 싶었다.     

 

 “자기야, 민지 탁구채를 사러 나왔는데 너무 장난감처럼 생긴 것들만 남았어, 어쩌지?”

 무언가를 시작할 때 항상 풀세트를 갖춰 시작하는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탁구를 이제 시작하는 아이에게 국가대표급 장비를 사주진 않을 거라 여겼지만 살짝 걱정됐다. 다음 날 저녁. 아이의 탁구 시작에 상당히 고무되어있던 남편은 상기된 얼굴로 종이 가방을 흔들며 나타났다.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민지야, 아빠가 탁구 라켓 사 왔!”

딸에게 칭찬받고 싶어 하는 딸바보 아빠의 모습이라니. 웃음이 새 나왔다.

“우와!”

라켓을 꺼내 보고 아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는 라켓을 꺼내 흔들어대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흥이 넘치는 부녀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뭐? 10만 원이 넘어?”

마트에서 만원 언저리의 장난감처럼 생긴 탁구채만 보다가 남편이 사 온 라켓의 가격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어쩐지 광채가 나면서 손에 착 안기는 느낌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얼마나 할지도 모르는데….”

세 아이를 키우는 터라 한 아이에게 고가의 무언가를 사준다는 게 부담이 됐다.

“안 하더라도 나중에 취미로라도 하면 좋잖아.”

아, 그래. 내가 당신을 너무 띄엄띄엄 봤구나. 아이의 달뜬 얼굴이 너무나 예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출처 - 픽사 베이


 

 탁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이는 온통 탁구 이야기뿐이었다. 재잘거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깟 10만 원짜리 라켓이 대수겠냐 싶지만 사실 남편이 10만 원이 아닌 20만 원을 주고 샀을지도 모른다는 게 내 생각이다. 40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자전거도 내게는 100만 원 남짓이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관심사가 아닌 것에 무지한 아내를 속이는 것쯤이야 남편에겐 식은 죽 먹기 일 것이다.         


 

 탁구 걸음마도 떼기 전, 시에서 주관하는 학교스포츠클럽 탁구대회가 열렸다. 아이를 대회에 내보내고 싶다는 담당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참가를 희망하는 아이의 간절한 눈빛에 OK 사인을 보내자 아이는 좋아서 난리가 났다.       

    

 대회 당일. 참가한 아이들을 훑어보니 딸아이보다 어린아이들부터 사춘기 아이들까지 몹시 다양한 연령층이었다. 그 속에서 너무도 작아 보이는 딸아이를 보며 ‘그래, 좋은 경험하고 오렴’ 마음으로 응원을 보냈다.      


 아이의 차례가 되어 상대를 보니 왠지 우리 딸아이보다 잘할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아이가 지고 나서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어차피 성장하는 동안에 겪어야 할 수많은 일 중 하나였다. 너무 많이 아프지 않고 수월하게 넘겼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아이는 3판 2선 승제 중 1판만 이기고 돌아왔다. 예선 탈락이었다. 눈시울을 붉히며 내게 뛰어오는 딸아이를 품에 폭 안고 괜찮다고 잘했다고 하염없이 말해주었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아이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펑펑 울어댔다. 짠하면서도 우습기도 했다. 그렇게 성장하는 거란다. 오늘을 잊지 말고 딛고 일어서렴. 아이를 한없이 토닥였다.     








 6년 후 오늘. 아이가 다시 시에서 주최하는 학교스포츠클럽 탁구대회에 출전했다. 6년 전과는 다르게 여자 단식 1등을 목표로 말이다. 사실 그동안 꾸준히 탁구 방과 후 수업에 참여했다. 아이는 별도로  탁구 개인지도를 받지 않았다. 그저 탁구가 좋아서 쉬는 시간마다 탁구대를 차지하기 위해 오픈 런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점심시간에도 탁구 치려고 식사도 거른 적이 있다는 사실도 후에 전해 들었다. 탁구에 대한 아이의 마음은 정말 진심이었다.         


  

 그동안 몇 번의 대회가 있었지만, 여자부 참가 선수 인원 미달로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정말 억울해했다. 대회에 참가했던 남학생들이 딸아이에게 네가 참가했으면 1등 했을 거라고 말할 때도 정말 속상해했다. 본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꿈이 좌절된 것이니 더욱 그러했을 거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는 여자 단식이 있었다. 딸아이는 환호하며 대회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이가 탁구를 얼마나 잘 치는지 본 적이 없다. 내게는 초등 3학년 때 예선에서 지고 돌아와 울던 모습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경기장에 일찍 도착해 아이를 지켜봤다. 친구들과 어울려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키도 나보다 컸고 날렵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언제 저 아이가 저렇게 자랐지, 싶다.          


 예선 경기중 3대 0으로 이긴 후 환한 미소를 띠며 내게 달려온 아이에게 말했다. 상대 선수가 우는 모습에서 초등 3학년 때의 너를 발견했다고. 나중에 저 아이도 열심히 해서 잘할 거라고 말하니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는 데 왜 이리 꽃보다 이쁜지, 눈이 부셨다.     

 

 몇 번의 예선을 치르고 8강, 또 4강 치를 때, 너무도 즐겁게 라켓을 휘두르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무언가를 저렇게 즐겁고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부러웠다.

 

 



출처 - 픽사 베이



  드디어 결승. 첫 세트를 진 후 아이는 정신력이 흔들리는 듯 보였다. 상대 선수는 남편과 내가 연습경기에서부터 예사롭지 않다고 보아왔던 아이였다. 학교에서 탁구부로 활동하는 아이인 듯 자세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예선 때도 만났지만 딸아이는 그 아이와 경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그런 아이와 결승에서 붙었는데 첫 세트를 그 아이가 가져갔으니 위축될 수밖에.   


         

 결승은 5판 3선 승제로 아이는 첫 세트를 뺏긴 후 내리 3세트를 이겼다. 아슬아슬했을 때도 있었지만 한 점, 한 점 내다보니 결국엔 원하던 바를 이루게 되었다. 순위와는 별개로 작은 탁구공 하나로 구슬땀을 흘리며 경기장을 누볐던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별처럼 빛났다. 그래, 너희가 모두 챔피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예선 탈락 후 펑펑 울던 아이가 탁구를 진심으로 좋아해서 결국엔 정상에 우뚝 섰다. 재능 있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을 못 따르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못 따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역시 즐기는 자를 당해낼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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