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로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

생고기, 생간, 생굴, 온갖 회여. 내 입으로 오라.

by 수련

나는 날로 먹는 걸 좋아한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좋아한다.


어릴 때는 날로 먹는 걸 좋아하는 수준이 범인의 것을 넘어선 정도였다. 5살부터는 가족들이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을라치면 차갑고 축축하며 부드러운, 아직 구워지지 않아 선홍빛을 띠는 생삼겹살 끄트머리를 몰래 떼어먹곤 했는데, 그것이 우리 집안에서 심심찮게 거론되는 나의 무용담(?) 중 하나다.



내가 날음식을 좋아하게 된 데는 우리 엄마의 영향이 크다. 엄마는 나를 임신하고 생고기를 무지하게 먹었단다.(참고로 흔히들 아는 뭉테기를 전라도에서는 생고기라고 부른다.) 그때 엄마가 생고기를 얼마나 잘 먹었는지, 생고기 한 근을 사 와서 써는 족족 입에 집어넣고 혼자 거뜬히 해치웠다고 한다. 그런 엄마의 딸로 태어난 나는 엄마만큼이나 생고기, 하면 눈이 돌아가고 환장하는 애가 되었다.

생고기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생간도 좋아한다. 어릴 때 아빠가 잘 아는 정육점에 가서 한 번씩 생간과 천엽을 떼오면 집 거실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소금 기름장에 간을 푹푹 찍어먹었다. 그때 먹은 달고 진한 간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생고기, 생간은 고추장으로 만든 양념장보단 참기름에 소금을 넣은 기름장에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아주 신선한 생고기의 경우에는 아무것도 찍어먹지 않아도 좋다. 생고기에서 나는 특유의 차진 식감과 더불어 달짝지근하고 고소한 고기맛 자체를 즐기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런저런 좋지 않은 냄새에 민감한 편인데도 정육점이나 식육식당에서 나는 신선한 고기 누린내는 전혀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편이다.





생고기 말고도 온갖 종류의 회도 전부 다 좋아하는데, 뼈째로 먹는 세꼬시를 즐겨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한창 부모님을 따라 가물치회를 먹으러 다닐 때 생선 가시를 잘못 삼킨 후로 생선 가시 기피증 같은 게 생겨서다.


하지만 제철마다 등장하는 전어회의 맛을 나만 제대로 못 느끼는 것 같아서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제철 미식가인 부모님을 따라 간 어느 횟집에서 무작정 세꼬시에 도전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작정 세꼬시를 먹기는 좀 그렇고, 일단 새콤달콤한 초장과 아삭아삭한 각종 채소들과 함께 버무려진 전어 무침을 먹어보기로 했다. 역시나 나를 낳아준 선배님인 엄마가 전어 무침에도 환장을 했기 때문에 그날 우리 가족식사의 애피타이저는 자연스럽게 전어무침이 되었다.


전어무침을 한 입 먹기 전, 혹시라도 이게 내 입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조금 걱정을 했다. 어디든 가서 뭐든 맛있게 먹어야 기분도 나는 법인데, 입에 맞지 않는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만큼 기분 상하는 일이 또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날의 전어무침은 아주 맛이 좋았다. 한창 철이 들었을 무렵의 전어는 뼈도 그닥 성성하지 않은 데다가 정말 세꼬시를 잘하는 횟집에서는 입 안에서 거슬릴만한 뼈는 똑똑 잘 끊어주기 때문에 전어의 뼈가 맛을 해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더불어 그 횟집의 전어무침 양념은 좀 특별한 느낌이 있었다. 아직도 그 전어무침을 떠올리면 입안에 상큼한 토마토 내음이 펼쳐진다. 이렇게 나는 서서히 세꼬시로도 영역을 넓혔다.




살면서 내가 크게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데 만약에 내 운을 어딘가에 몰빵 했다면 아마 여기에 다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지금껏 생굴이나 회를 먹고 탈이 나본 적이 없다!



굴 먹을 시즌이 다가오면 심심찮게 노로 바이러스에 한 번 걸린 뒤로는 굴을 절대 못 먹게 되었다는 사람들의 경험담이 들린다. 아,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진심으로 이입이 되어서 혹시나 나도 노로 바이러스에 걸려서 생굴을 다시는 못 먹게 되면 어쩌나, 하는 오싹함을 느낀다.


굴은 생으로 먹어도 좋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굴전에 맛들려서 생으로 먹기보다는 전으로 먹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도 꼭 추워질 때 횟집에 가면 곁들인 상차림에 딸려 나오는 생굴이 반갑고, 몇 점 안 되는 생굴이 아쉬워서 꼭 한 접시는 추가로 주문한다.


생굴을 먹을 때는 주로 초장에 찍어 먹는데 실수로 초장을 너무 많이 묻히면 굴 맛을 해친다. 그리고 가끔 굴 해감이 덜 된 경우에는 굴에서 짠맛이 너무 강하게 날 때도 있는데 그건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아무리 별 기교 없이 내오는 생굴이라고 해도 먹으려면 식당을 잘 골라서 가야만 한다.



요즘 굴의 맛을 극대화해서 먹는 방법은 역시 김치와 함께 굴을 담궈 굴김치를 만들어서 수육과 함께 먹는 것이다. 평상시에 밥 자체를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닌데 고기 없이 굴김치만 있어도 밥을 두 그릇씩 먹게 된다.





다른 계절보다 겨울을 크게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날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계절이 아주 반가울 이유가 많다. 덥고 습한 날씨에 만나보기 어려운 좋은 날 음식들이 제철을 맞아서 오랜만에 고개를 내밀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도 친구들과의 약속, 가족과의 식사 자리를 기다리게 된다.


11월 중반을 지나는 지금, 온몸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추위가 강렬해지지만 전혀 싫지 않다. 날이 추워지면 추워질수록 방어는 더욱 기름기가 많아지고 살이 탱알탱알 오른다. 특히 숭어는 추워질수록 맛있어지는 생선이라서 제일 추운 날에 꼭 한 번, 아니 두 번은 먹어줘야 한다. 클래식이자 스테디셀러인 광어는 말할 것도 없는데, 다른 때 먹으면 약간 느끼하게 느껴질 수 있는 광어 뱃살이 이때만큼은 소주 안주로 딱이다.




분명히 할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줄을 서있었는데, 다 지나고 보니 올해가 다 가고 있다. 문득 정신을 차려 올 1년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나 하고 생각해 보니까 해낸 것, 이룬 것도 많았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과 잃은 것도 많았다.


사는 것에는 어느 것 하나도 쉬운 것이 없다. 매 순간 눈을 부릅뜨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사람, 기회, 돈, 그 어떤 것도 내 손아귀에 붙들어 둘 수가 없다. 인간사라는 게 이토록 고달프고 귀찮다.


그래도 나는 매년 초봄엔 보리숭어를, 여름이 되기 전 5월에는 참치회를, 가을에는 전어와 간장게장을, 겨울에는 온갖 회와 생굴을 먹고 싶다. 이것들 챙기는 것은 전혀 귀찮지 않다.


난 사계절의 제철 날것들을 먹기 위해 사는지도 모른다. 지난날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모든 것들은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설렘을 주지 않지만 제철음식만큼은 아직도 내 심장이 세차게 뛰도록 하니까.





내가 바라는 내 인생의 성공은 이런 거다. 매 시기마다 나오는 신선한 제철음식을 아무런 고민 걱정 없이 넙덕넙덕 사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거면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이미 나는 행복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다.


사는 게 어렵다는 생각에 괴로워질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날 것들을 떠올려야겠다. 고등어회 한 점, 막회 한 쌈에 기분 좋아질 건데 그렇게 너무 힘들어하지 말자고! 나에게 격려를 보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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