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후기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가 만드는 프랑켄슈타인은 어떤 것일까 기대했는데, 전체적으로 상당히 고전적이며 델 토로 특유의 음산하고 기괴한 오컬트적인 분위기가 풍부한 미장센이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마음을 흡족게 했다.
델 토로 감독의 지휘하에 오스카 아이작은 음흉하고 심술궂은 데다가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비열하기까지 한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을 선보였다. 그가 원래 가진 특유의 느물거리는 인상은 자칫 잘못하면 섹시해 보이기 때문에 그 캐릭터의 몰입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초반엔 염려 아닌 염려도 했다. 하지만 대배우답게 오스카 아이작은 프랑켄슈타인 특유의 불쾌하고 악독한 몽타주를 훌륭하게 뽑아냈다.
사실 오스카 아이작의 프랑켄슈타인보다도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처음 알게 된 제이콥 엘로디가 표현한 괴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역대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 중 아마 가장 처연하고 예쁜 외모를 가진 괴물이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현실에 발 붙이고 살아가지 못해 위태롭고 몽환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미아 고스의 엘리자베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오늘은 영화 속에 등장한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영화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프랑켄슈타인 남작이자 의사의 장남으로 등장한다. 그의 어머니는 프랑켄슈타인 남작의 재력과 명성을 보고 결혼을 한 젊은 여자다. 극 중 빅터의 어머니는 항상 붉은 드레스와 베일을, 빅터는 흰 상의와 바지와 타이, 남작은 검은 정장을 갖추어 입는다.
빅터의 어머니가 온통 붉은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 그가 고통과 환희를 동시에 느끼는, 즉 피 흘리는 출산 중인 상태를 살았던 인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빅터의 어머니는 남편의 강한 통제와 그로 인한 부부 갈등으로 인해 고통받으면서 큰 아들 빅터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는 인물로 나타난다.
빅터는 아기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엄격한 아버지에게 매서운 교육을 받을 때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는 아이다. 그러나 입이 바싹 마르는 아버지의 수업 시간에도 반드시 꼭 흰 우유를 마시며,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 젖을 잊지 못한 아기처럼 흰 우유를 마신다.
결국 어머니는 동생을 낳다가 죽었고, 어머니를 여읜 빅터는 사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냉정한 아버지 밑에서 비뚤어진 성인으로 자란다. 어머니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바로 아버지였는데, 빅터는 아버지가 부러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것이다. 사랑이 없는 자리에 죽음이 생겨났다. 빅터는 이때 자신이 잃어버린 무한한 사랑의 원천의 상실을 죽음에서 찾으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빅터가 사랑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삶과 죽음을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착각했다고 생각한다.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며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 아버지 아래 자란 자식은 인간의 애정과 사랑, 영적인 교류에 대해서는 하나도 배우지 못한 채 성장했다.
빅터가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일한 것은 세상 만물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상아탑 꼭대기에 빛나는 별과 같은 지성이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반드시 있는 법. 빅터가 가진 어둠은 치명적이었다. 그 어둠은 그의 마음에 남아있던 신에 대한 의지와 희망,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누리는 평화와 안정에 대한 순수한 소망이 전부 가려졌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괴물을 완성시켜 놓고서 기진맥진하여 침대에서 잠든다. 아니, 그는 자신이 무얼 만들었는지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괴물을 내버려 두고 방으로 돌아가 잠에 골아떨어졌다. 그리고서 아침이 되어서야 자신의 발치까지 찾아온 괴물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영화에서 이 장면 속 빅터의 얼굴을 보면서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누군지도 모를 상대와 관계를 맺고 나서 얼마 후, 얼떨결에 아이가 생긴 사실을 알았을 때 당황스러움과 공포, 두려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약간의 환희와 두근거림에 찬 무책임한 젊은 부모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새로운 피조물의 탄생의 경이로움은 찰나일 뿐이었다. 빅터는 오직 "빅터"라는 자신의 이름 한 단어만 반복할 줄 밖에 모르는 괴물을 축축하고 어둡고 싸늘한 지하실에 감금한다.
아버지로부터 외운 것을 바로 대답하지 못하면 모욕적인 체벌을 받으며 자라온 빅터는 자신이 낳은 괴물에게도 그 교육법을 똑같이 적용한다. 어머니를 살리지 못한 아버지를 경멸하고 증오하면서도 아버지가 가르쳐준대로 잔인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괴물을 대한다.
빅터는 잃어버린 사랑을 위해 죽음을 손에 넣고자 괴물을 창조했으나 그 모든 목적은 잊은 채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랬듯이 괴물에게도 아름답고 수준 높은 지능의 징후만을 바란다. 하지만 갓 태어난 괴물은 오직 아버지의 이름만을 반복할 뿐이다. 좋을 때도 "빅터", 슬플 때도 "빅터", 외로울 때도 "빅터", 괴로울 때도 "빅터".
빅터로부터 버림받은 괴물은 여차저차 다른 세상으로부터 인간처럼 사는 법을 배운다. 모든 자녀가 반드시 부모로부터 길러지지는 않는 법이다. 좋은 사람, 좋은 친구가 있는 곳에서는 부모가 없더라도 사랑과 지혜, 철학을 배울 수가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흘러가는가?'와 같은 질문엔 나의 창조자, 나의 부모에게서만 납득할만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영원히 나를 사랑해 줄 그 누군가 또한 나의 가족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괴물은 빅터를 찾으러 떠난다.
빅터와 괴물의 여정은 지지부진하게 끝이 보이지 않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을 의미한다. 자식이 태어나면서 부모로 태어난 자와 부모로 인해 자식으로 태어난 자, 미성숙한 두 인간의 싸움이다. 빅터는 괴물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만든 것을 후회한다. 너는 나의 실수다. 괴물은 빅터에게 말한다. 나는 이런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네가 나를 책임져라.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라고 하면 당연히 닭이 먼저 있어야 하듯 부모가 먼저 있어야 자식이 있다.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하고 어떤 부분이 어긋나 있는지 알지 못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정말정말 어렵게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겨우 알게 된다. 하지만 그 내용이 흔히 '옳다'라고 여겨지는 것이 아닐 때가 더 많아서 그렇게 뒤틀린 내용물을 가지고 나이만 먹은 자식은 또 다시 다른 자식의 아쉬운 부모가 된다.
프랑켄슈타인의 결말은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다. 그리고 그 주제도 그러하다. 인간인 창조자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피조물인 괴물. 그러나 과연 누가 진짜 인간이고 괴물인가?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죽이고자 했던 둘은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받아들인다. 피조물인 괴물보다도 더 괴물 같은 인간인 빅터는 삶의 끝에서야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눈을 감는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괴물을 사랑하고 그로부터 용서받기를 바라는 가엾고 모자란 아버지임을 스스로 깨닫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시체더미에서 태어난 자신을 증오하고 삶을 거부했던 괴물은 자신이 빅터의 아들이자 빅터는 그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자식으로 세상에 태어난 그 이유 자체가 바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된, 이 세상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사명을 똑같이 받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랑과 증오, 용서와 갈등, 삶과 죽음. 이 모든 것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 속에 숨 쉰다. 하나인 것 같으면서도 전혀 하나가 되지 못하는 대척점에 선 관계, 너무 잘 알 것 같다가도 영원히 모를 것 같고, 잘 알지만 모른 척하고 싶은 그 사이가 부모와 자식이다. 하지만 서로가 없이는 각자가 완성될 수 없는 사이임에는 분명하다.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나의 얼굴에서 바라볼 부모를 위해서, 언젠가 나의 자식이 될 그 자를 위해서 우리는 부모이자 자식으로서 내내 사랑하고 용서할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영화 맨 마지막 크레딧에 나오는 바이런의 말과 같이 부서진 마음이 있다면 그 부서진 마음대로 살면 되는 것처럼 우리는 각자 생긴 모양대로 살아가면 된다. 어떤 부모, 어떤 자식, 어떤 나의 모습을 하고 살아갈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빅터는 괴물에게 용서를 구하고, 괴물은 살아가기로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