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세이] 9화
피렌체는 쇼핑하기 좋은 도시 축에 속하는데, 유명 브랜드 뿐 아니라 이탈리아 특유의 가죽 제품들을 저렴하게 구매하기도 좋아서다. 싸구려 물건들의 퀄리티까지 흡족한 편이라 눈요기 하기 딱이다.
산로렌조 가죽시장에 가면 노천에 자리를 깐 트럭 장수들에게 넘어갈 게 아니라, 그곳을 살짝 벗어난 뒷골목 가죽숍들을 찾아 다녀야 한다. 물론 예를 들면 뉴욕 소호처럼 요즘 핫하다는 디자이너 숍들이 늘어선 그런 골목 분위기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최첨단의 세련된 디자인은 없어도 '메이드 인 차이나'는 아닌, 아주 오랫동안 직접 자신만의 가죽 제품을 만들고 취급해 온 가게들이 빼곡하다. 나로서는 유행하는 아이템을 쇼핑하고 싶은 생각도 없거니와 유행과 상관없이 자기 스타일을 오래 고수하는 이탈리아의 클래식함이 더 마음에 착 와 감긴다.
하루는 아침에 충동구매한 한화 3만원 짜리 가죽 지갑이 맘에 들어서 이날 종일 쇼핑을 하기로 했다. 산타크로체 교회 주변 골목을 뒤져보기로 했는데, 그 근방이 가죽 공방의 메카였다. 우연히 내부를 들여다 본 한 엄숙한 공방의 뒷편에는 중국인들이 버스를 타고 단체 쇼핑을 오는 유명한 페루치 쇼핑몰이 있었다. 질 좋은 양가죽 자켓을 십만 원, 이십만 원 대에 파는 가게들도 있었다.
좀 더 배회하니 화방이 몰려있는 골목도 나왔다. 그날은 작은 그림도 하나 샀다. 그 값어치는 안하는 그림일 수 있지만(아마 그렇겠지만), 실컷 화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놓고서 차마 안 사고 돌아나오려니 마음이 약해졌다. 사면 깎아준다고까지 하니 더더욱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잘못된 쇼핑의 전형적인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피렌체의 화가가 그린 무언가를 집어서 비행기에 태워 한국에 데려온다는 것엔, 그림값을 넘어서는 소소하지만 분명한 의미가 있다.
또 그날 밤에는 마침 좋은 정보를 얻은 덕에 특별히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오데온 극장에 가서 공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길을 걷다 우연히 오데온 극장을 마주치지 못했다면, 집주인 L이 거길 꼭 가보라고 추천하지 않았다면, 마침 그날 켄 로치의 영화를 무료로 상영한다는 안내문이 문 앞에 붙어있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일이었다.
저녁 8시 30분에 입장한-입장이랄 것도 없는 게 안내원 하나 없이 그냥 문 열린 텅빈 상영관에 사람들이 시간 맞춰 알아서 들어갈 뿐이다-원형 극장은 진짜 귀족들이 연극이나 오페라를 감상하러 왔을 법한 그런 곳이었다. 시대가 바뀌어 이제 그곳은 영화를 보여주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벨벳으로 마무리된 의자도, 둥근 돔의 천장도, 모든 것이 옛것 그대로였다. 드레스를 입고 장갑을 낀 여인들이 나타날 것만 같은 공간을 편한 옷차림의 피렌체 시민들이 가득 메웠다. 1,2층 좌석이 금방 다 찼다. 멀티플렉스보다 심지어 의자는 훨씬 더 푹신하고, 머리를 뒤로 기대도 스크린이 잘 보였다. 일말의 빛도 허용치 않는 요즘 3D 상영관의 완벽한 암흑에 비하면 오데온 극장 안은 깜깜하다기 보다는 그저 느긋하게 어스름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팝콘 먹는 소리는 커녕 부스럭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영화는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 먼지 풀풀 날리는 스페인 내전 전쟁 장면이 가득했다. 영화가 끝나니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 둥근 극장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켄 로치의 영화를 함께 본 건, 앞으로 점점 더 선명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이날 아침에는 무언가로 인해 조금 속상했었다. 그런데 그 속상한 마음이 나중에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여행 온 이래 모처럼 꽉차게 보낸 하루로 끝났다. 인생의 대부분은 역시 우연이 만들어가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그도 그럴 법한 게 세상에 선택지는 너무 많다. 그 중 하나를 고르는 건 결국 운명이거나 우연이거나 뭐 그런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잠시 휴가를 다녀와서 업로드가 늦어졌네요. 예전에 써둔 에세이를 모아 일주일에 한 편씩 연재하고 있는데 어느덧 9화째입니다. 모두 연말연초 여행 계획 있으신가요? :)
ps.오데온 극장의 상영 스케줄은 공식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 가능하답니다. 무료 상영이 있는 날 들러보시면 특별한 이탈리아를 경험하고 돌아가실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