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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owhat Jun 21. 2022

잘못한 게 없어도 죄인이 되는 세상

한공주(2014), 이수진

#영화를 본 뒤 피해자, 가해자, 죄인, 희생자의 개념에 대해 다시 고민해봤다. 보통 가해자=죄인, 피해자=희생자라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가해자가 곧 죄인과 동격이 되지 않기도 하는 곳이 이 지독한 '사람 사는 곳'이다. 어쩌면 상식이라는 건 실체 없는, 보고 싶은 대로만 세상을 보는 우리의 믿음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공주의 전 학교 선생님은 영화 초반, 중국집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공주야, 너 잘못 안 한 거 다 알아. 근데 그게 아니야.”

잘못이란 말에 얼어붙은 공주 앞에서, 선생님은 짬뽕을 후루룩 먹으며 또 말한다. “잘잘못은 법원 가서 따지는 거고, 사람 사는 데서는 잘못 했다고 죄인이고 잘못 안했다고 아닌 게 아니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잘못을 했는데 죄인이 아니고 잘못을 안했는데 안 한 게 아니라니. 이건 무슨 부조리일까. 

논리에도 맞지 않는 이 말이 영화 내내 맴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이 부조리한 말이 완벽히 이해된다. 그게 가장 슬펐다. 



#공주에 대한 직접적 가해자가 아닌 주변 인물들도 부조리의 한가운데 놓여 있긴 마찬가지다. 선생님 어머니, 공주 엄마, 편의점 김사장, 동윤이, 새로 전학간 학교의 친구들...이들의 무신경한 언사, 무관심, 침묵 또는 지나친 호의는 그대로 공주에게 생채기가 됐다. 아마 이들 행동의 대상이 공주 아닌 다른 아이였다면 그저 약간의 관심 혹은 무관심에 그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간신히 자신을 방어하고 있던 공주에겐 이 모든 게 날카로운 비수가 됐다. 주변 사람들은 공주가 겪어온 일련의 과정을 몰랐다. 공주가 남들보다 더 취약한 위치에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렇지만 무지가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공주가 받은 상처는 현실로 남았고, 주변 인물들은 비자발적 공범자가 됐다.


공주를 성적으로 유린한 인물들은 철저한 자각과 의도를 갖고 가해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의 법칙이 뭔지, 그들은 죄인이 되지 않았다. 공주 주변에서 2차적으로 공주에게 상처를 입힌 인물들은 애초에 그럴 의도와 자각마저 없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지 않았다. 결국 공주의 상처를 책임지는 사람은 공주 말고는 아무도 없게 됐다. 세상의 법칙이 부조리였다. 



# (결말 스포일러 있음)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이렇게 ‘사람 사는 곳’에서 죄와 죄의 출처가 모호해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세상의 지독함은 결국 공주를 막다른 길로 몰아 넣었고, 난 영화를 몇번이나 돌려봤다. 솔직히 공주가 결국 구원받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공주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후에도 일상을 회복하고자 안간힘을 썼고 그런 공주를 너무나도 응원하고 싶지만, 그녀의 노력이 보상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선다. 

마지막에 공주가 강물에 몸을 던진 뒤 서서히 헤엄치는 장면은 열린 결말이다. ‘물에 빠지면 죽어서, 마지막 순간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어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던 공주가 죽지 않고 힘차게 헤엄쳐 나오는 희망적인 결말로 볼 수도 있다. 혹은 공주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휩쓸려 가는 마지막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수진 감독은 시나리오에서부터 공주가 살아남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결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나는 공주가 떠내려간 게 끝일 거라고 짐짓 생각하고 싶었다. 논리와 이성, 상식, 시스템이 개입할 여지조차 없는 어두운 심연-선의와 악의가 끝 모를 듯 모호해지는 이 지독한 곳에서 공주를 구원할 수 있는 게 오로지 그녀 본인의 생명력 뿐이라면 그것 또한 너무 처절해서다. 영화 엔딩에 깔린, 공주의 25m 풀장 완주를 응원하는 듯한 함성 소리를 나 또한 공주에게 보내주고 싶었지만...상처 입은 자를 아무도 보듬어 주지 않는 세상, 그리고 그 치유마저도 당사자 혼자 죽을 힘을 다해야 겨우 얻어낼 수 있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그녀가 여기서 하루라도 빨리 더 자유로워지길 바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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