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 누가 괴물인가
내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의 신작이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는 단 한 명의 영화감독이다. 작가 중엔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렇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일본인) <괴물>도 개봉하자마자 응당 볼 영화니까-하며 오히려 큰 기대 없는 마음으로 찾았다. 근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고 왔다. 이제는 좀 식상해져도, 혹은 자의식이 과해져 다소 별로(?)인 작품을 내놓더라도, '그럴 법 하지- 그동안 애쓰셨다'며 이해할 만큼 거장이 된 감독이 또 한 번 레벨을 넘어서다니…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리하여 짙고 길게 남는 여운에 며칠이 넘도록 젖어있었다.
영화는 1,2,3부의 플롯으로 나뉜다. 각 파트마다 1인칭 시점의 인물이 달라진다. 1,2,3부 모두 동일한 며칠 간의 시간을 보여주는데, 이를 각 인물의 관점에서 보여주기 때문에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이 완전히 다른 해석으로 관객에게 다가오는 게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하나의 사건을 여러 인물의 관점에서본다는 설정은 한편으론 평이하다. 하지만 감독은 이 구조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시너지를 일으킨다. 인물들의 시선 단차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미스터리는 긴장감의 밀도를 높이고, 3인 3겹으로 중첩된 스토리 구조는 궁극적으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그 자체가 된다. 바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일면만 보아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런데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주, 한 면만 본 채 게으르고 무성의하게 세상을 판단한다는 것.
(약 스포)
이제 영화의 줄거리를 간략히 정리해본다. 1부는 아들 미나토가 학교폭력을 당한다고 의심하는 엄마 사오리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싱글맘으로서 혼자 키우는 아들 미나토가 이상한 낌새를 보여서다. 학교 담임교사인 호리 선생님으로부터 '돼지 뇌를 가진 인간'이란 말을 들었다 하고, 물통 속에선 진흙이 나오기도 한다. 급기야 학교에 가기 주저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사오리는 이 모든 조각들을 종합하여 미나토가 담임인 호리 선생님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합리적인 추측'을 하게 된다. 곧장 학교를 찾아가 면담을 요청하는데, 교장을 비롯해 책임있는 교사진의 반응은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비합리적'이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자 하는 엄마에게 교사들은 기계적인 사죄만 반복한다. "당신들 지금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는 게 맞냐"고 사오리가 되물을 정도로 대화가 되지 않는 상황. 결국 두 번째로 학교에 찾아가게 되고, 급기야 호리 선생은 미나토가 괴롭힘을 당하는 입장이 아닌 가하고 있는 입장이라는 의미심장한 얘길 한다. 미나토가 호시카와 요리라는 친구를 괴롭히는 학폭 가해자라는 것. 내가 아는 아들이 학폭 가해자라고? 그 뒤로 불안한 날들이 반복되다가, 태풍이 불어닥친 어느 날 미나토는 사라진다.
뒤이어 2부는 1부에서 (사오리의 시점으로 상황을 먼저 본 관객이라면) '악인'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교사 호리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앞서 고요한 드라마 같던 영화가 여기서 첫 반전을 준다. 사오리의 시선으로 봤던 호리는 사이코패스 같고 섬뜩한 사람이었다. 미나토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려는 나쁜 교사로도 추측됐다. 하지만 2부에서 하나씩 풀려나오는 그의 행위와 동기는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고 책임감 있는 여타 교사의 그것이었다. 1부는 관객으로 하여금 호리를 사이코로 믿게 만들었으나, 2부는 그 믿음을 하나씩 깨는 반대 정황들로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2부에서 보여지는 교사 호리는 나름의 근거를 갖고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히고 있다고 추측, 이를 막으려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폭력교사로 오인받고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앞서 1부에선 호리가 '괴롭힘 가해 교사(=괴물)'로 보였고 2부에선 미나토가 '학폭 가해자이자 거짓말쟁이(=괴물)'로 보였다면, 3부는 미나토의 입장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3번째 반전으로 미나토마저 괴물이 아니라는 게 아닌가. 이쯤 되면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안고 3부를 본다. 상당한 러닝타임이 흘렀을 게 분명한 데도 양파껍질 같은 플롯 덕분에 몰입도는 오히려 더 고조된다. 그동안 미나토가 왜 이상행동을 보였는지, 미나토와 요리 두 친구 중 누가 누구를 괴롭힌 것인지, 둘의 진짜 관계는 무엇인지 밝혀질 것이라 기대하게 만든다. 종국엔 엄마 사오리와 교사 호리가 자신을 오해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아이의 사정까지 보여준다. 그렇게 크게 세 파트로 이뤄진 영화를 끝내고 나면, 어떤 한 파트만 갖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의 실체가 드러난다. 진실이란 것은 어쩌면 대체로 이렇게 진흙 속에 묻혀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씁쓸한 깨달음과 함께.
'이들이 오해의 조각들이 쌓이기 전 조금만 더 서로 소통하려 했다면..' 이라는 뻔한 문제의식에 중간중간 가닿았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렇게 답을 내리자면 편리할 테지만, 그런 무성의한 결론 짓기를 경계하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보여져서다. 결론으로 걸어가는 모든 걸음걸음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영화다. 그런 영화를 두고 게으른 문제의식에 머무를 순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찬찬히 다 본 후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몰이해의 필연성과, 그것을 수긍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 전제 위에서 진실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에 대해. 인간이 타자를 완벽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가능한가? (인간은 자기자신도 완벽히 이해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관계는 늘 불완전함 가운데 성립하고, 때때로 위태롭다. 영화는 그것이 관계의 본질이기도 하다며 위로를 건넨다. 본의 아니게 상처내고 상처입은 이들을 관조한다. 뿐만 아니라 따뜻한 시선까지 한 움큼 얹어서 바라봐준다.
역사가 반복되듯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서로에게 무성의 할 것이다. 소통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오랜 격언을 이행하는 대신 오작동이 세팅된 로봇처럼 미성숙한 행태를 반복할 것이다. 피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이 태풍 속에서 모두가 괜찮았으면 좋겠다. 이 지점을 말하고자 감독이 이번 영화를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주장과 대안과 비판을 덜어낸 자리에도 한 겹으로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남는다. 이는 오직 영화만이 창조할 수 있는 감각인데, 특히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가 자아내는 그것을 나는 참 좋아한다. 지금껏 그는 늘 겹겹의 렌즈로 세상을 관찰하는 듯한 감독이었다. 헌데 이번 영화엔 겹겹의 렌즈를 아예 영화적 장치로 들여왔으니, 이는 좋아하는 감독의 연출 시그니처 끝판왕 격이 아닌가. 영화를 본 후 아이스크림을 한 번에 3개 양껏 먹은 양 즐거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