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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곳 Sep 05. 2019

느긋함의 미학

겪어보니 느린 것도 괜찮더라

나는 참 느린 사람이다.

동물로 비유하면 코알라 정도 될까?

다행히 만화 속 나무늘보처럼 느리지는 않다.      


“쟤한테 뭐 시키면  한참 기다려야 돼”

“집도 안 넓은데 오는데 뭐 이리 오래 걸려?”

“그냥 내가 하고 말지”     

나에게 심부름시키는 엄마의 단골 멘트다.      


집에서 뿐일까

일단 걸음부터 느리다.

(보통 사람들의 두 배로 걸어야 발이 맞을 때가 많다)

밥을 천천히 오래 먹는 것은 기본

(처음 식사를 함께 한 지인은 나를 끝까지 젓가락을 놓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깜빡이는 신호등을 보면 다음 신호를 기다리고

역으로 들어오는 지하철 안내를 보고도 뛸 생각이 없으며

(요즘에는 예상 시간보다 10분, 15분씩 먼저 나온다)

심지어 일처리도 남들보다 느려 하루 먼저 시작할 때가 빈번하다.

(물론 나무늘보가 아니기에 마감시간을 어긴 적은 없다)     


재밌는 건 말은 빠르고 머릿속엔 늘 초조함을 달고 산다는 것이다.

일명, 걱정봇 기질이 있지만 그럼에도 내 몸은 느긋함을 추구한다.

어쩌면 느린 유전자가 따로 있나 싶을 정도로     


이렇게 느린 삶을 보내며 느낀 점들이 있는데

바로 사는데 아무 지장 없다는 거다.

빠르고 분주하게 움직인다고 돈을 더 버는 것도 건강해지는 것도

삶의 질이 올라가거나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좀 더 빨리 살아보려다 오히려 일을 망친 적이 여럿 있었다.

하나둘씩 빼먹는 것들이 늘고 업무는 수정이 더 많아지는 것은 기본

무엇보다 몸이 힘들어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졌다.

애초에 나는 민첩한 사람, 빨리빨리가 가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전까지 나는 마냥 느린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나만의 속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내게 익숙한 템포대로 움직이고 살아가니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됐다.

신기하게도 관찰력과 상상력도 미세하게 향상됐다.  

남들보다 한 박자 늦은 삶을 살다 보니 의외로 좋은 점도 있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그러면서 집에서는 마음 편한 딸로 인식되었고

회사에서도 심지 굳은 직원이 되어있었다.      

이제 엄마는 날 보며 “그래, 쟤처럼 사는 게 마음 편해”라며

나의 느긋함을 인정하고 존중해주기 시작했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 겪어보니 느긋함에도 미학이라는 게 있더라.  

뭐든지 빠른 것만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느긋함과 기다림의 미학을 배워가고 있다.      


내 인생 모토 중에 하나를 꼽자면

‘롤러코스터가 아닌 회전목마 같은 삶’이다

충분히 주변을 볼 수 있고 적당한 즐거움을 주면서

열심히 움직이는 회전목마 같은 삶

그런 인생을 살고 싶고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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