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쓸모 있을 날이 오겠지
나는 미니멀리즘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최근 서점에 나온 미니멀리즘, 정리 관련 책은 애초에 펼쳐보지도 않았다.
분명 나는 못 할걸 알기에
자잘한 물건들을 이유 없이, 자주 사는 습관도 있지만
중요한 건 뭐든 쉽게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걸 보고 못버림병이라고 한다.
유치원 때 보던 과학 전집
초등학생 때 썼던 일기장과 백과사전
중 고등학교 때 입었던 교복, 시험 성적표
친구들과 찍은 스티커 사진, 그동안 받은 편지들
내일로 여행 때문에 모은 전국지도
10년 가까이 일을 하면서 회의 때 썼던 노트들과 받은 명함
지금까지 봐왔던 영화표, 5년째 안 신는 장화
10살 먹은 나의 첫 노트북, 좋아했던 가수의 노래 테이프
그동안 써왔던 폴더 폰과 스마트 폰들까지...
그밖에 더 많은 것들이 내 방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아마 내가 모르고 있는 물건들도 많을 거다.
분명 보지도 쓰지도 않을 텐데
왜 버리지 못하는지 물어본다면 이유는 늘 같다.
1. 언젠가 나에게 쓸모가 있을까 봐,
2. 이것도 추억이니까
그리고 사람도 똑같다.
내 에너지를 쏙 빼가는 에너지 뱀파이어 지인이나
일로 크게 싸운 적 있는 전 직장동료,
재수 없기로 소문난 전 직장상사
돈을 빌려 달라했던 찌질한 구남친까지!
나에게 해로운 인간관계도 쉽게 끊어내지 못했다.
심지어 미소와 친절한 말투를 끝까지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이유 역시 똑같다.
언젠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 일까 봐
덕분에 나는 대외적으로 세상 유한 성격의 평화주의자가 되었지만
그놈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좀 힘들게 사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끌어안고 있는 물건들과 사람들은 쓸모가 있었냐고?
모른다. 아직 그 언젠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도움이 되는 인맥이 있긴 있었지만~)
내년, 내후년이 될 때까지 일기장과 편지, 교복과 휴대폰
그리고 찜찜하고 애매한 사람들은 여전히 내 주변에 있을 것이다.
마음 한 구석에 ‘그래도’ 라는 녀석이 자리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나에게 있어 못버림병은 애증의 고질병이다.
추억이 될지 쓰레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왕 이렇게 남아있을 것이라면
좋은 추억, 비싼 골동품, 반전의 귀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자연 소멸되거나 알아서 떨어져 나가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