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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곳 Dec 13. 2019

네, 전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인프피 (INFP) 성향 직장인의 고된 사회생활

몹시도 평범하고 평화로운 평일 오후. 휴대폰에 카톡 소리가 울렸다. 

불과 몇 십분 전에 통화했던 직장 선배였다. 대화창엔 장문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고 그 속에는 자신을 대하는 내 태도 평가는 물론 나의 성격 지적, 그동안 느꼈던 서운함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방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해놓고 도대체 왜?’     

긴 시간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계속 생각에 잠겼다. 

평소 제법 친하다 생각했고 배울 점 많은 선배였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나와 다른 이상향을 갖고 있다고 눈치채고 조금 거리를 두며 지낸 것이 화근인 거 같았다.      

그녀는 나를 직장 후배 그 이상의 무언가로 생각하는 거 같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의 친분의 과시하고 애틋한 관계처럼 이야기를 했다고 종종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녀는 친한 직장 선배에 불과했다. 

회사에서 만나서 함께 얼굴을 보는 동안 근황을 전하고 웃고 떠들고 퇴근 후에는 온전히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으려는 나와 달리 그녀는 퇴근 후는 기본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늦은 시간에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연락을 하며 모든 일상을 공유하려는 타입이었다. 

심지어 갑자기 업무를 주고는 이건 다 우리가 잘 되기 위한 과정이라 말하며 내가 더 많은 업무를 해내길 원했다. 아마도 우리가 보이지 않는 의리, 끈끈한 무언가로 얽혀 화수분처럼 끝없이 넘치는 교류가 있길 바랬나 보다. 하지만 나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대답이 느리거나 반응이 없으면 서운해하거나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어느새 나는 후배 또는 친한 동생이 아닌 그녀의 눈치를 보며 일하고 생활하는 절대 을이 되어 버렸다. 

왜, 도대체 왜 직장동료, 선후배인데 사생활까지 보고해야 하지?!

왜, 도대체 왜 업무 외적으로 선배의 감정까지 다 맞춰서 생활해야 하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답장을 써 내려갔다. 

내가 남에게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렇고 서운한 점이 있다면 죄송하다. 나름 긴 변명과 사과를 보내고 난 뒤에 억울함과 화가 솟구쳤다. 그동안 후배로서 힘든 것도 참아가며 그녀를 대했는데 요 근래 조금 서운하게 했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나를 비난하다니, 그런 모습에 반박 하나 못하고 사과를 해야 하는 내 꼴이 너무 처량하고 비참하기까지 했다. 그녀로 인해 내가 힘들고 지쳤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듯했다. 나는 무례하고 예의 없는 후배가 되었지만 어쩌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그녀였다.      


선배에게 보낸 답장을 다시 한번 읽어 내려갔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단어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남에게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성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문득 며칠 전 친구들과 회사 이야기를 하다 무심코 튀어나온 mbti검사가 떠올랐다.      


mbti는 사람의 성격을 외향적, 내향적, 직감적, 감각적 등 성향을 분석해 16가지로 구분한 검사로 나는 친절한 성격으로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타주의자 INFP 형 사람으로 결론이 났었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잔다르크형 인간으로 충돌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기본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며 싫은 소리 못하고 겉으로 괜찮아 보이지만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그런 사람이다. 또한 망상과 잡생각이 많으면서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남들은 물론 가족에게까지 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그래,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INFP유형은 내 성격과 나와 99% 일치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름 오랜 시간 함께하며 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정작 나의 기본 성격조차 모르는 그녀가 문제였던 것이다! 나에게 혼자 있는 시간을 충분히 제공했다면 이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 시절에 함께 지내던 친구들이 ‘너는 왜 네 이야기를 안 해?’라고 따지듯 묻는 날이 있었다. 나는 충분히 내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는 마냥 부족했던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들과 멀어졌고 온전한 내 시간을 갖는 것을 이해해주고 내가 하는 이야기를 존중해주고 내 성격을 알아주는 새 친구들을 사귀고 10년 넘게 인연을 맺어가고 있다.      


그녀와 내가 대학교에서 혹은 동호회에서 만났다면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주고받아 가까워졌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고 그녀를 대했을 것이다. 

심지어 일로 만난 사이에서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법.

장문의 메시지를 남긴 그녀는 나의 답장에 여전히 대답이 없으며 나는 다시 선배의 눈치를 보며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을 찾아 헤맬 것이다.      

 16가지 유형 중에 INFP형 사람이 제법 많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이 나처럼 힘든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안쓰럽고 슬픈 동시에 작은 위안이 된다. 

지금도 직장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 힘내고 있는 이들에게 소소한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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