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였던 대학시절과 너무나 달라진 체력은 둘째치고 잦은 새벽 퇴근으로 늘어나는 택시비가 문제였다.
길에다 돈을 버리는 날이 늘수록 스트레스는 쌓여갔고 돈을 벌러 회사를 가는 건지 버리러 가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운이 좋아 일이 밤에 끝나도 10시만 되면끊겨버리는 마을버스에 꼼짝없이 회사에 갇혀있어야 했고 밤을 꼴딱 새우고 첫차 타고 퇴근을 하는 날에는 반 생얼에 무릎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형편없는 차림을 장착한 내가 잘 차려입고 좋은 향 풀풀 풍기는 출근인들 사이에 있자니 알 수 없는 자괴감까지 들었다.(물론 그들의 멘탈은 나와 다를 바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너무 멀었다.
그래서 회사 근처에 집을 알아봤다. 하지만 이곳에서 서울 집을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스트레스라 생각한 나는 스물아홉 가을, 생애 첫 차를 사기로 결심했다.
결심은 쉬웠지만 모든 것이 어렵고 낯설었다. 차를 만드는 회사 이름은커녕 종류도 몰라 모든 차들을 검은 차, 흰 차, 큰 차, 귀여운 차로 구분하던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일단 차 좀 알 거 같은 주변 남자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고맙게도 지식을 뽐내길 좋아하는 남자 사람들은 나에게 넘치는 정보를 주었고 그중에서 필요한 정보만 골라서 기억해야 했다. 그렇게 원하는 차종과 색상을 추릴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이 엄청나게 오래 걸렸고 밤새 인터넷의 늪에 빠져 살아야 했었다.
차가 튼튼하면 부품이 비싸다 하고 부품이 저렴하면 차체가 포일이라 하고... 옵션이 괜찮으면 연식이 오래됐고 적게 탄 차는 깡통 차나 다름없고... 그야말로 뫼비우스의 띠였다.
어찌어찌 내가 정한 기준에 맞는 차량은 정해졌고 이제 실제로 차를 봐야 했다. 새 차와 중고차 중에서도 고민을 했지만 분명 내 차는 금세 범퍼카 수준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중고차로 결정을 했고 (또한 새 차를 살 돈도 넉넉하지 않았다) 이후 가장 안전하다는 중고차 사이트에서 원하는 차량을 검색했는데, 세상에... 차 하나에도 등급이 이렇게 많다니, 옵션은 왜 이리 많은지!
가죽시트, 열선, 시동 버튼 등 원하는 옵션을 선택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차량 가격에 ‘이럴 거면 새 차를 사지!’라는 말을 수도 없이 내뱉었다. 인터넷에만 봤던 보태보태병이 나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설상가상 마음에 드는 차가 있어 실제로 보러 간다 해도 차알못인 내가 뭘 볼 수 있을까?
‘음... 예쁘네, 음... 차네. 음... 이게 시동 버튼인가?’ 고작 이 정도였다.
이래서 1년이 지나도 차를 살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래서 전문가를 소환했다.
며칠 뒤, 중고차 매장으로 출장 정비 기사님을 불렀다. 매장 앞에서 만나 첫 차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넌지시 전달하고 꼼꼼하게 봐달라는 무언의 눈빛도 건넸다.
고맙게도 정비 기사님은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열정까지 보여주며 차를 꼼꼼히 체크해주었고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이 차는 안 사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아... 돈으로 경험을 산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감사 인사와 별점 5개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차를 보기 시작했다. 차종, 연도, 연식, 옵션...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삼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를 가엽게 보던 아빠가 삼촌에게 SOS를 보낸 것이다. 아는 중고차 딜러분에게 말해 차를 골라 놓았으니 보러 오라는 거였다.
아빠도 삼촌이 잘 얘기했으니 그냥 차를 가져와도 되겠다 했지만 요즘 세상에 가족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출장 정비 기사님을 소환했다.
삼촌도, 딜러 분도 아빠도 당황하는 모습이었지만 그때 그 순간에 내가 100%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정비 기사님 뿐이었다.
기사님은 20분 넘게 차를 살펴보고 뜯어보고 나서야 OK 사인을 주셨고 나는 돈을 주고 얻은 잔지식을 총동원해 또다시 체크를 한 후에야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이 과정에서도 딜러 분과 아주 소심한 기싸움을 통해 차량 가격을 조금 깎은 것도 나름의 자랑거리로 남았다.
앞으로 3년간 저 스티커를 달고 살아야 될 듯 하다.
지금의 내 차 숙성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딜러분이 삼촌에게 조카가 대단하다는 후기를 남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뿌듯했다. 어찌하겠는가 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이렇게라도 깐깐하게 살아야지... 두 번은 못할 짓이었다. 사실 삼촌이 나타나 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아니었으면 출장 기사님을 무한 소환해야 할 수도 있었으니~
비록 장롱면허로 연수 학원을 알아보고 일정을 맞추느라 숙성이를 한 달간 주차장에 세워 놔야 했지만 (주차장에 묵혀두었다고 해서 이름도 숙성이가 되었다. 친구는 몇 달 더 있었으면 이름을 발효라 부르겠다 했었다.) 이제는 집과 회사를 엄청 빠른 시간에 오가며 운전자의 삶을 살고 있다. 아직 집-회사 밖에 못 다니는 초보운전자지만 이렇게 귀한 인연을 맺은 내 첫 차, 숙성이와 오래오래 무탈히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식 하나 없어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몸으로 실천했으니 말이다~ 이번 계기로 또 하나 느낀 점, 집을 산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