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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레 soore Oct 30. 2020

곁에 남을 것인가, 떠나 올 것인가.


스웨덴에서의 삶이 시작된 그 겨울날로부터 70일이 지났다.


매일같이 눈폭풍이 불고, 영하로 뚝뚝 떨어지던 기온은 이제 없다. 나고 자란 서울을 제외하고 한 도시에서 이렇게 오래 머무른 건 처음이다. 매일매일은 듬성듬성 이어진 뜨개질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알람 없이 눈을 뜨면 그대로 침대에 누워 몸에 익은 스트레칭을 한다. 스트레칭이 끝날 때쯤엔 바닥에 깔린 요가매트 위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휘리릭 양치질을 하고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른 후 밖으로 나가 자전거 바퀴를 굴린다. 10분쯤 떨어진 대형 식료품점에서 오늘 먹을 과일과 요리할 재료들을 사서 돌아오면 하루가 시작된다.      


2호선에 몸을 욱여넣고, 혜화역 1번 출구 앞에서 긴 셔틀버스 줄에 발을 동동 구르던 때가 있었다. 만원 버스에 올라타려 낑낑대는 사람들 틈에 섞여 손잡이도 제대로 잡지 못해 두 발에 온 신경을 집중할 때도 있었다. 나는 아직 오늘을 살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자꾸만 오늘로 떠미는 것 같았다. ‘When will my life begin’, 높은 탑에 갇힌 라푼젤의 노래처럼 진짜 내 인생은 언제쯤 시작하려나, 이렇게 팍팍하고 치열한 삶만이 내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다고 믿었다.


지하철도 만원 버스도 없는 웁살라는 내게 지구 반대편이었다. 매일매일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그냥 평생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 그래서였다. 매일 반복되는 낯섦과 익숙함이 좋았다. 모든 말소리가 들리고 모든 간판이 이해되는 세상이 버거운 나에겐 들리는 말의 8할이 스쳐가는 외국살이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고.     




“내 방에서 핫초코 한 잔 먹고 갈래?”     


열한 시가 넘은 늦은 밤, 비웬 Biwen의 한마디에 깜짝 놀랐다. 항상 일찍 잠들던 친구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뜬금없는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우유 코코아 가루를 섞으며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한참을  들이던 그녀가 별안간 외삼촌 이야기를 시작했다. 많은 조카들 중에서도 그녀를 유난히도 아꼈다는 외삼촌. 호주에서 유학하는 그녀는 방학마다 중국으로 돌아가 외삼촌을 만나곤 했는데, 지난겨울엔 스웨덴으로 바로 건너오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학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6월에는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 외삼촌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와의 약속을 아직도 손에  쥐고 있는 그녀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듯했지만 그녀를 진짜 힘들게 하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엄마를 위로해줄 수가 없어.”     


베이징에서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기로 결심하고 호주로 향하기까지 그녀의 발걸음엔 언제나 확신이 있었다. 스웨덴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호주로 돌아가면 이어서 석사학위에 매진할 것이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일들을 해나가기 위해 앞으로만 달려가며  오랫동안 호주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외삼촌의 죽음 앞에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비웬은  수화기 건너편의 딸이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가족과 함께 나눌 수도 없었고 전화기를 붙잡고 엉엉 우는 엄마의 손을 잡아줄 수도 없었다. 아닌 척하면서 타지에 나가 있는 외동딸을 걱정하는 아빠를 안심시켜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너무도 멀리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그들의 곁에 남아있어야 하는  아닐까.     


이곳에서의 삶이 좋아서, 그래서 그냥 평생을 이렇게 살아버릴까 생각하는 날도 있었지만, 언젠가 그 결정을 후회하는 날이  버릴까  무서웠다.

그때 떠나지 말걸,

그냥 그들과 함께 살아갈 ,

너무 많은 시간을 놓쳐버린  아닐까 

자책하게 되는 날이 오면 도무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꿈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좋아하는 일을 하려 수의대에 진학했고,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과 오래오래 함께 지낼 계획을 세웠다. 문득 그녀가 생각이 났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복잡한 마음에 밤늦은 시간 홀로 밖에 나갔다. 멍하니 길을 걷다 머리끈을 떨어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길을 다시 돌아올 것을 알았기에 개의치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찾으면 되겠지, 금방 돌아올 거니까. 그렇게 계속 걸었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앞으로 가고 싶어 졌다.  가본 길을 걷고  걸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기어코 어난 초록잎들과 하늘을 빽빽하게 채운 별들이 너무 아름다워 멈출 수가 없었다. 머리끈을 주워 들고 집으로 돌아가야지 생각했는데, 그새 까맣게 잊은  아주 오랜 시간  위에 있었다.      


곁에 남을 것인가, 떠나 올 것인가.  


어쩌면 그 선택은 이미 내 몫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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