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옷이 하나도 없다-.
어쩌자고 맞지도 않는 옷을 가져왔을까. 스웨덴에 가면 스트레스를 안 받을 테니까 대충 살이 빠지겠지, 그럼 이 바지들이 맞겠지.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매몰되어 작아진 반바지들을 한 아름 가지고 왔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이 바지들은 마음의 짐이었다. 높은 할인율을 핑계로 뭉텅이째 사온 옷이었다. 3만 원짜리 바지가 1만 원에 판다고 눈대중으로 사 온 바지들은 곧장 옷장으로 직행했다. 그것들을 보는 내 맘도 편치가 않았다. 마음 편히 버리지도 못할 쓰레기를 돈 주고 사 온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언젠가부터 옷장을 차지하는 옷을 보다 못해 한 번 걸치고 나가는 날엔 스스로가 예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지못한 손길을 한 번씩 남겨줄 뿐이었다.
홍콩에서 온 스테파니 Stephanie와 옷을 사러 갔다. 정확히는, 구경하러 갔다. 핀란드 토종 브랜드 마리메꼬 marimekko의 사악한 가격에 손수건 한 장 못 살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북유럽 감성을 제대로 담고 있다기에 일부러 찾았다. 불행히도, 마음에 쏙 드는 옷뿐이었다. 어차피 못 살 거, 개중 제일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왔다. 마리메꼬 시그니처 문양이 크게 들어간 재킷이었다.
‘세상에 너무 잘 어울린다!’
누가 나에게 해준 말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내가 그랬다. 다홍색의 꽃이 촘촘히 박힌 하얀 재킷을 입은 모습이, 꼭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옷을 입는 것만으로 가슴이 설레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렴하다는 이유로, 할인율이 높다는 이유로 생각 없이 건져온 옷들로 옷장을 채우는 동안 내가 놓친 건 돈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나를 알아갈 기회를 빼앗긴 것이다. 내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단화가 좋은지 운동화가 좋은지, 스키니 핏 바지가 잘 어울리는지 넉넉한 핏의 바지가 잘 어울리는지.
생각해보니 옛날부터 오렌지색을 좋아했다.
가을이 올 것만 같이 생긴 오묘한 빛깔의 보라색도 좋다.
발이 아파서 반나절도 못 견딜 테지만, 구두가 좋다.
사진을 지나치게 많이 찍는 친구와 생각보다 잘 논다.
쿵쿵 EDM 보다는 피아노 음악이 좋다.
파스타는 지겹지만 바질 페스토는 언제나 옳다.
사람이 좋지만 붐비는 건 싫다.
맥주보단 코코넛 향이 들어간 칵테일이 좋다.
언젠가 스테파니에게 스웨덴에 온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젊은 날의 한 순간을 이곳에서 보내기로 선택한 이유. 궁금했다.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나의 질문에 스테파니는 ‘나를 찾기 위해’라고 답했다. 늘 잘 어울리는 옷을 입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찾아갈 게 많은 모양이었다. 평생 데리고 살면서 나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나는 정말 갈 길이 멀다.
재킷은 제자리에 내려놓고 가게를 나섰지만 마음이 가벼웠다. 이제 나의 역할이 남았다. 오랫동안 미뤄둔 숙제를 시작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