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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레 soore Oct 28. 2020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를 테니까

나의 오늘이 과거의 내가 그린 오늘과 같을 수는 없다. 그냥 살다 보니까, 라는 이유로 생각지 못한 오늘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과거의 나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과거의 나와 함께 멈춰있는 사람들, 그들의 기억 속의 나와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현듯 오늘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아주 길었던 책상 앞의 삶을 뒤로하고 처음 세상으로 나왔을 때 나는 폴란드에 있었다. 유림 언니와 나는 그곳에서 만났다. 언니는 인도네시아에서 15년 넘게 살며 그곳에서 대학을 나왔다. 하지만 언니는 늘 외국인이었다. 여행자로 산 삶이 길었다. 언니에게 폴란드 봉사 프로그램에 지원한 건 또 하나의 여행이었다. 그에 반해 한 동네에서 토박이로 자라난 나에게 폴란드는 모험이었다. 너무 다른 삶을 살아온 우리가 폴란드에서 만났다. 평생이 여행이었다는 언니는 자꾸만 머뭇거리는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 많이도 다녔다. 언제든 힘차게 걷는 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덕분에 열아홉의 여름이 화창했다.       



크라쿠프 구시가지의 이름 모를 카페


언젠가 폴란드 크라쿠프 Krakow를 함께 여행했다. 벌써 여름이 다 지나가던 무렵이었다. 봉사 프로그램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한국으로, 언니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졌다. 2박 3일 짬을 내 만든 여행이 소중했다. 크라쿠프 구시가지를 걷다 엽서 두 장을 샀다. 카페에 앉아 앞에 앉아있는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엽서가 도착하길 기대하며, 서로가 서로의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기억하려고.        


시간이 흘러 우리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그 삶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그렇게 편지는 잊혀버렸다. SNS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그리울 틈 없이 바쁘게 살았다. 무엇이 담겼는지 알 수 없는 편지가 쓰인 지 2년이 지날 무렵 그 편지를 사진으로 받았다. 2년 전의 내가 그 안에 있었다.     


‘……내년 영국 유학 준비 잘하고!’     


영국이라니! 지금 스웨덴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내가 크라쿠프의 카페에서는 영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짧은 엽서에 들어있을 정도면 그 당시에는 꽤 진지했던 모양이었다. 왜 영국을 생각했고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려고 했었는지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진첩을 뒤져 지난 사진들을 들여다봤다.


크라쿠프에서 신나게 영국 유학을 이야기했을 내가 보였다. 그 속에 내가 너무 어렸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커다란 앞니를 내어놓고 환히 웃고 있었다. 제 앞에 어떤 미래가 놓여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서는.       



그때 그시절



‘언니를 만나서 행복했어.’     

‘언니가 한국에 오면 내 친구들 소개해줄게! 꼭 와야 해!’     


나의 엽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언니가 그리울 거라는 걸 벌써 알았던 모양이다. 언니가 없었더라면 첫 발을 못 떼었을지도 몰라. 덕분에 나는 이렇게 스웨덴에 있어. 언니가 말했던 여행자의 삶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나 보다.


사람은, 생각은 변하기 마련이다. 흘러가버리는 것들을 붙잡을 수도, 붙잡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어딘가에 담아놓는다면 다락방 골동품 뒤지듯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통통한 볼을 가득 채우고선 함박웃음을 짓는 나를 발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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