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보리 Valborg가 시작됐다. 스웨덴에서는 길고 혹독한 겨울이 다 지나가고 비로소 봄이 왔음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4월 30일 봄의 축제 발보리를 개최한다. 혹자는 매년 돌아오는 봄을 축제까지 열며 환영할 이유가 있냐고 말하겠지만, 스웨덴의 겨울을 나 본 사람만이 발보리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4월이 다 될 때까지 패딩을 벗지 못한 우리의 겨울은 너무도 춥고 지나치게 길었다.
웁살라는 한낮의 수제 보트 게임으로 봄을 환영한다. 이 황당하고 참신한 축제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이도 성별도 다른 서너 명이 팀을 이뤄 웁살라를 관통하는 피리스 Fyris 강으로 나왔다. 제각각 플라스틱과 나무토막을 동원하여 개성이 가득 담긴 미니보트를 만들어 강을 따라 열심히 노를 저었다. 경기에는 경쟁이 없었다. 대신 약간의 물총 싸움과 약간의 장애물이 있을 뿐이었다. 강 하류에 급류 구간에서는 보트의 8할이 뒤집혔는데, 그건 그 경기의 또 다른 재미가 될 뿐 승부 같은 건 아무래도 의미가 없었다. 구경꾼들은 강가에 바짝 붙어 구경을 하다가 보트가 가까워지면 과자를 건네주기도 하고 다 함께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다.
밤에는 동네의 제일 큰 공터에서 큰 불을 피웠다. 티나 Tina와 함께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리는지 만원 버스를 몇 번이나 보내고 겨우 버스에 올라탔다. 사람들 틈에 끼여 힘겹게 도착한 곳에서 우리를 맞이한 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대한 불이었다. 수백 개의 나무를 한데 모아 만든 커다란 불은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에 둘러싸인 그 불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이 봄이 끝나지 않게 해 주세요. 이곳을 떠나도 이곳에 머물게 해 주세요. 머리 위로 쉴 새 없이 터지는 폭죽처럼 내 마음도 붕 떴다.
폭죽놀이가 끝이 나고 몰려든 인파가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을 때 내가 서있는 땅이 어딘지를 알아챘다. 티나와 내가 눈 오는 날 버스정류장에서 만나 친구가 되고 함께 떠난 첫 여행지, 하얀 눈의 세계 그곳이었다. 그땐 그저 버스를 타고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에 가 닿은 이름 모를 동네였는데, 소복이 눈이 쌓인 거리를 신나서 뛰어다니던 우리가 이곳에 다시 왔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온통 하얀색뿐이었던 풍경이었는데, 어느새 눈은 다 녹아버리고 초록색 옷을 입고 있었다.
“티나, 기억나? 우리가 처음 떠나온 여행 바로 거기야. 우리 마지막 여행이야.”
이제 진짜 봄이 와버렸다. 처음이 있었는데,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보리가 끝나면 이제 더 이상은 눈이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창밖을 보며 또 눈이 왔다고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긴 겨울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는데, 뒤늦게 생각해본다. 왜 우리는 언제나 다가올 봄만을 기다리며 살았을까, 지나가는 겨울도 있는데. 해가 떠버리면 어두운 거리들 사이로 내리는 노란 달빛도, 물감을 흩뿌린 듯 펼쳐진 별들도 더 이상 없을 텐데, 우리는 해 뜰 날만을 기다리며 살았다. 새삼 하늘을 낯설게 바라봤다. 다 꺼져버린 불과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과 피어오르는 노을이 더없이 소중했다.